[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83회

등록 2006.03.08 08:28수정 2006.03.0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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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대위에 살해당했다던 모용화천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였다. 모용화궁의 말을 들은 좌중은 허탈했다. 사실 모용화천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모용화궁이었다. 허나 모용화궁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닌가?

“허나 그 동안 본 가주도 손놓고 있지만은 않았네. 본 가의 식솔들을 은밀하게 포섭해 온 그를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겠나?”


“알고 계신단 말인가요?”

“짐작 가는 인물이 몇 명 있네. 이미 조사를 시켜 놓았으니 곧 밝혀질 걸세. 어쩌면 밝혀졌음에도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라 아직 모르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네.”

“그 인물들이 누구요?”

구효기가 급히 묻자 모용화궁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치도 않은 상황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하고 싶지 않소. 조만간 알게 되면 반드시 말씀드리겠소.”


모용화궁의 얼마 전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듯 빗대어 말하는 투에 구효기는 입을 다물었다. 어찌되었든 바로 회의석상에서 죄 없는 모용화궁을 흉수로 몰아갔던 터라 내심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소첩 역시 짐작 가는 인물이 세 명 있어요. 가주와 상의하면 좀 더 쉽게 밝혀내지 않을까요?”


“아직 이곳에 계신 분들은 본 가주의 부탁을 승낙하지 않으셨네.”

모용화궁의 말에 좌중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용화궁의 마음을 모를 것도 아니었다. 손이 귀한 가문에 차기 가주로 내정된 인물이 모용수다. 더구나 적손(嫡孫)이라는 의미는 가문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모용가의 대가 끊어지지는 않겠지만 적손이 없는 가문으로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허나 이 일은 누가 나서서 함부로 대답할 사안이 아니었다. 누가 책임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모용수가 어떤 모습과 태도를 보일지 모르지만 칼에는 눈이 없다. 모용화천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잠시 시간을 주셔야 하겠소. 노부 개인적인 마음이야 이미 결정을 했지만 본 맹의 일 인만큼 회의를 통해 결정해야 할 것이오.”

어쩔 수 없다는 듯 구효기가 대답하자 모용화궁은 고개를 끄떡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모용화궁이 바라던 대답이기도 했다. 맹에서 결정한다면 모용수의 목숨만큼은 건질 수 있다.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부모의 마음은 똑같다. 그는 사정하듯 부언했다.

“그저 살려만 달라는 것이오. 무공을 폐지해도 좋고, 팔 다리를 잘라도 좋소. 대를 잇게 해주시오. 이번 일이 끝나면 본가는 향후 이십년 동안 봉문 하겠소. 물론 그 후라도 모용수는 절대 무림에 나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 약속드리오.”

부친의 애절한 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자식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떠한 모욕이라도 참을 수 있고, 어떠한 치욕도 감수할 수 있는 게 부모다.

-------------

소녀에 의해 안내되어 간 곳은 이상한 곳이었다. 아주 넓은 석실이었지만 사각도 아니었고, 원형도 아닌 팔각형의 방이었다. 사방 여덟 개의 벽에는 한결같이 유등이 걸려있어 방 안은 매우 밝았지만, 사방 네 곳에 놓여진 향로에서 타오르는 향의 연기로 인해 안개가 살짝 낀 듯 뿌연 편이었다.

방 안에는 아주 괴이할 정도로 여인의 상(像)들만 즐비했는데 몇 개인지 세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개수도 개수려니와 그 모양과 자세 역시 각양각색이었고, 상을 만든 재질도 다양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돌을 깎아 만든 나상이 있는가 하면 향기 나는 자단목(紫檀木)으로 깎은 목상도 있었다. 자기를 굽듯 구워 만든 상도 있었고, 벽면에 까지 부조(浮彫)되어 있었다. 대(臺)에 올려져 있는 것도 있었고,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도 있었다. 상의 수만큼 그 모습도 매우 다양했다.

허나 많은 종류의 상이 있었지만 그 대상은 오직 한 여인의 것이었다. 이국적인 모습의 미녀. 바로 연동에 들어와 수없이 보았던 유항의 모습이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유항의 상은 적나라하게 여인의 치부까지 드러내고 있는 나상(裸像)이 대부분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매우 곤혹스럽게 했다. 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여인이 서있는 것도 같아 움직인다 해도 이상하게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

잠시 유항의 다양한 모습에 정신을 파는 사이, 어느 틈엔가 여기까지 안내한 소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잠시 소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자 영롱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차를 마시겠어요? 아니면 술을 드시겠나요?”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회성전음(回聲傳音) 같아서 종잡을 수 없었다. 어쩌면 수많은 나상 중 하나에서 나온 것도 같았다.

“나는 지금 몹시 목이 마르니 차를 마시는 것이 좋겠소.”

그는 대답과 함께 정신을 집중해 청각을 최대한 높였다. 목소리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볼 심산이었다. 여인의 대답은 곧 바로 이어졌다.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이 마실 차에는 두 가지 춘약(春藥)과 한 가지 음약(淫藥)을 넣은 것이거든요. 아직까지 해독약이 없는 것이라 당신이 그것을 마시고도 참을 수 있는지 궁금하군요. 그래도 당신은 차를 마시겠어요?”

정말 기이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청각을 높였음에도 목소리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여인의 목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리는 듯 하다가 천정 위에서 들리는 듯 했고, 앞에서 들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하게 들려 더욱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술을 마실 수밖에 없겠구려.”

“물론이에요. 하지만 술에도 역시 한 가지 미약(媚藥)이 들어있어요. 아주 귀한 재료로 만든 것이라 남자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약이기도 해요. 또한 그 미약은 그 한 가지만으로는 당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아요.”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낳을 것 같았다. 그러자 담천의는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해 졌다.

“그것 참 고약한 일이구려. 헌데 내가 왜 당신이 주는 차나 술을 마셔야 하는 것이오?”

“당신은 소첩이 모신 손님이니까요.”

“당신은 언제나 찾아 온 손님에게 미약 따위를 먹이는 것이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에요. 이곳은 쾌락의 방(快樂之室)이라 불리는 곳이죠. 이곳에 오신 손님 중 이런 대접을 받을 분은 그리 많지 않아요.”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담천의는 불쑥 장난기가 발동했다.

“거 참 이상한 일이구려. 나에게 춘약을 먹이게 되면 나는 아직 젊은 몸이라 참을 수 없게 되오. 당신의 몸이라도 나에게 주겠다는 뜻이오? 나는 아직 당신의 손끝조차 보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오.”

사실 노류장화라면 몰라도 여염집 여인에게는 할 수 없는 노골적인 말이었다. 상대 여인을 격동시켜 끌어내려는 의도였지만 너무 뻔한 수작이어서 누구라도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호호.... 소첩에게는 사랑하는 부군이 있으니 당치 않은 말씀이에요. 다만 당신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다보니 소첩은 반드시 당신을 위해 월하빙인(月下氷人)이 되고픈 마음이 들더군요.”

월하빙인이란 남녀를 짝지어 주는 사람을 말함이다. 그러자 담천의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뜻은 가상하지만 사양해야 될 것 같소. 나 역시 아직 정식으로 혼례는 올리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몸이라오.”

“사내란 아무리 말은 그럴 듯 하게 변명해도 열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더구나 담대협과 같은 사내대장부라면 모름지기 삼처사첩(三妻四妾) 정도 거느려도 아무도 무어라 할 사람이 없을 거예요.”

“아주 달콤한 말이구려. 하지만 나는.....”

담천의가 다시 거절하려는 듯 말을 꺼내자 여인이 그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당신이 원하던 아니던 당신은 반드시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마셔야 할 거예요. 주인된 입장에서 손님을 모시는데 그냥 맞을 수는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 당신이 마시지 않겠다면 소첩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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