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만나러 가는데 신분증이 왜 필요하죠?”

대추리 촛불문화제에 다녀와서

등록 2006.05.21 16:15수정 2006.05.2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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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 평화공원에서. 정한섭씨와 박제우, 심하나, 과학기술대 학생들
대추리 평화공원에서. 정한섭씨와 박제우, 심하나, 과학기술대 학생들송성영
"어떤 일로 가십니까?"
"친구 만나려구요."
"신분증 좀 보여 주시죠."
"왜요? 친구 만나러 가는데 신분증이 왜 필요하죠?"
"시위가 있을지 몰라서요."


20일, 평택 대추리 마을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경찰들이 우리가 탄 자동차를 막았다. 우리 차에는 공주시 반포면에 사는 정한섭(41)씨와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에 다니는 심하나(화학과 4년)씨, 박제우(전산과 석사과정)씨와 나를 포함해 모두 네 명이 타고 있었다. '과기대' 학생들은 처음 당하는 일이라서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지만 정 선생은 당당했다.

"무슨 시위가 있다고 그래요! 오늘 시위 없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여기 있어요 신분증, 됐지요."
"뒤에 있는 두 사람 신분증도 보여 주시고…."

"아참, 왜 자꾸 그래요! 우리가 신분증을 꼭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혹시 시위가 발생해 다치기라도 하면 보호해야 하니까요."
"아, 걱정하지 말아요! 누가 누굴 보호해줘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길이나 막지 말고 비켜요!"

"트렁크 좀 열어주세요."
"왜 트렁크에 쇠파이프라도 들어 있을까 봐서요, 트렁크 열려 있으니까 얼마든지 봐요!"

검문 경찰은 막무가내로 트렁크를 열어 보았다. 트렁크 안에는 우리 집에서 재배한 야채와 정 선생이 사온 돼지고기 몇 근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문정현 신부님과 몇몇 대추리 주민들과 자원봉사 친구들을 위한 저녁식사 거리였다.


힘든 친구들 만나 저녁식사 좀 하겠다는 우리 일행은 법 조항에도 없는 무지막지한 검문검색을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잘난 법 조항에도 없는 검문검색이었기에 우리는 당당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국경선 통과하듯 까다로운 통관 절차를 밟고서야 대추리로 들어설 수 있었다.

대추리 곳곳에 진을 치고 있는 전경들
대추리 곳곳에 진을 치고 있는 전경들송성영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대추리로 들어온 몇몇 사람들은 검문검색 때문에 아예 차에서 내려 산길을 타고 오거나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까다로운 검문검색 때문에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부지기라고 한다. 되돌아간 사람들에게 대추리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 끝이었다. 대추리는 우리 땅에 그어진 또 다른 국경선이었다. 고립된 섬, 대추리는 비무장지대처럼 긴장 속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대추리는 분명 미군들의 점령지가 아니다. 국경선도 아니다. 오고가는데 법적인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아도 되는 우리 땅인 것이다.

폐허가 된 대추리 분교에는 평화의 깃발만 나부끼고
폐허가 된 대추리 분교에는 평화의 깃발만 나부끼고송성영
경찰들의 우려와는 전혀 다르게 대추리 마을에는 쇠파이프를 든 시위대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시위 진압용 곤봉을 든 전경들이 마을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을 일삼는 미군들로부터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곤봉'이 아니었다. 평화를 갈망하는 자국민을 향한 '곤봉'이었다.

폐허가 된 대추리 분교에 피어나는 토끼풀
폐허가 된 대추리 분교에 피어나는 토끼풀송성영
자국민을 향한 그들의 '곤봉'은 대추리 분교를 완전 폐허로 만들었다. 폐허가 된 대추리 분교에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설명해 주듯 누군가의 신발 한 짝이 나뒹굴고 있었고 학교 주변을 감싸 안아 주었던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비롯한 온갖 나무들이 송두리째 뽑히고 잘려져 있었다.

그 폐허 속에서도 평화의 깃발은 나부끼고 토끼풀 꽃은 피어나고 있었다. 토끼풀 꽃은 생각 없이 피어나고 있었지만 꽃목걸이에 꽃시계를 만들며 재잘거렸을 대추리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토끼풀에 사진기를 고정시키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미군부대 쪽에서 떠올랐다. 미군 헬기는 그 살벌한 무력 진압조차 어찌하지 못했던 동상, 기상 넘치는 사내의 죽창 끝에 꽂히고 있었다.

대추리 분교에 세워진 동상에 저만치 미군기지에서 날아오른 헬기
대추리 분교에 세워진 동상에 저만치 미군기지에서 날아오른 헬기송성영
우리는 '생명평화마중물'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원섭씨의 안내로 '대추리 평화공원'과 미군기지가 들어설 예정지와 마을 곳곳을 둘러보았다.

지난해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20분쯤 떨어진 공주시 반포면으로 이사 오고부터 줄곧 이웃사촌으로 지내고 있는 정 선생은 참으로 엉뚱한 사람이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의 주업은 방송장비를 만드는 일, 부업은 올 봄부터 시작한 농사, 거기다가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직장에 나가는 아내 대신 두 남매를 챙겨주는 가정주부 노릇까지 당당하게 해내고 있다.

그는 종종 초보농사꾼인 내게 찾아와 이것저것 영양가 없는 농사 정보를 얻어가고 있는데 언젠가 우리 밭 가장자리 둠벙에 송사리 몇 마리를 풀어놓기도 했다. 그러고는 우리 집에 찾아 올 때마다 한동안 둠벙가에 쪼그려 앉아 어린아이처럼 송사리를 관찰하곤 했던 순수한 사람이다.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수더분한 문정현 신부님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수더분한 문정현 신부님송성영
가정주부 노릇하랴 생업에 부업까지 챙기랴, 그 바쁜 와중에도 토요일이 돌아오면 부안 '새만금'과 평택 '대추리'를 찾아다니고 있는 정한섭씨.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대추리를 왕래해 오고 있던 터라 어지간한 마을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있었다. 그에게는 대추리 사람들이 이웃 어른들이었고 친구였다.

저녁 식사는 문정현 신부님과 몇몇 사람들이 함께 했다. 돼지고기와 야채가 부족할까 싶었는데 충분했다. 다들 맛있게 먹어 줘서 농사지은 보람이 있었다. 특히 문정현 신부님은 야채를 아주 좋아했다.

식사를 마치고 이웃집 할아버지 같이 수더분한 신부님 건강을 물었는데 대답은 간결했다.

"농사짓는 사람이 몸이 안 좋다고 농사를 안 지을 수 있나."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부터 30여년을 불의와 맞서 싸워 온 문정현 신부님, 그 지칠 줄 모르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녁 7시 30분, '대추리 평화 공원'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강화에서 찾아온 '기차 길 옆 공부방' 아이들이 주민들을 위해 인형극을 펼쳐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한 일본에서 '오끼나와 미군기지 반대 투쟁단' 몇몇이 '아름다운 음악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라는 노래로 힘을 보탰다.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대추리 주민들이었다.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대추리 주민들이었다.송성영
이날 627일째 '대추리 촛불문화제'에서는 경찰들이 우려하는 시위는 전혀 없었다. 어렸을 때 저녁밥을 챙겨 먹고 강변에 몰려가 영화를 보던 기억이 떠오를 정도로 평화로웠다. '대추리'를 외딴 섬으로 만들어 버린 미군기지조차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평화의 촛불만이 타올랐다.

문득 이웃 마을로 마실 나온 기분이 들었다. 힘들어 하는 이웃 사람들에게 야채 한 바구니 싸들고 찾아왔다가 오히려 공연 대접을 받고 있었다. 공주에서 대추리로 출발하기 전에 따라오겠다던 우리 집 아이들을 떼 놓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촛불문화제에서 공연하는 강화에서 온 '기찻길 옆 공부방 아이들'
촛불문화제에서 공연하는 강화에서 온 '기찻길 옆 공부방 아이들'송성영
사실 촛불문화제에 전국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 동네 사람들이었다. '평화 지킴이'들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나선 사이비 언론들의 선동과 강압적인 검문검색이 큰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적어도 이번 촛불문화제는 주민들보다 외부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이비 언론들의 '헛소리'를 확인해 주는 자리이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대추리 앞 너른 벌, 저 멀리에 고립된 도두리 마을로 빠져 나왔다. 도두리 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둠 그 자체로 뒤덮여 있었다. 전경들만이 임시 검문소를 차려놓고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줄줄이 이어진 검문소를 빠져 나오면서 정 선생은 "돌아갈 때마다 발걸음이 무겁네요"라고 했고 뒷좌석에 타고 있던 한국과학기술원 학생 중에 누군가 그랬다.

"지난번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가서 강의실에 앉았는데 우리가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특정집단이라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저번에는 마을도 못 보고 돌아갔었는데 이번에는 더 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나는 또 어떤 '특정집단'에 속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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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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