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이 임진왜란의 수혜자가 된 이유

조선 전기 대여진 정책의 교훈

등록 2006.06.19 11:19수정 2006.06.1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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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1592~1598년)은 조·명 연합군이 일본의 대륙 침략을 막아낸 전쟁이다. 하지만 이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조선도, 명나라도, 일본도 아닌 제3자였다. 최대 수혜자는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챙긴 여진족(후금·청나라)이었다.

종전 후 조선·명나라·일본이 모두 지친 틈을 타서, 여진족은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으로 조선을 우군으로 만든 뒤 그 여세를 몰아 당대 최강 명나라를 제압(1644년)하고 동아시아의 '월드컵'을 끌어안았다.

임진왜란의 승자, 여진족

여진족이 어부지리를 챙길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건국 이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과 명나라가 취한 대(對)여진 정책에서 그 주요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명나라(1368년)와 조선(1392년)의 건국 당시, 두 나라의 최대 골칫거리는 동북방의 여진족이었다. 오늘날 중국 학자들은 여진족이 명나라 지배권에 편입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독립적인 할거 상태였다. 이 여진족이 요동(만주)을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 명나라는 여진족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여진족을 더 두려워한 것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 쪽이었다. 이미 10세기 이래 만리장성 동북방에 있는 거란족·몽골족·여진족이 각각 한 차례씩 중원을 위협하거나 혹은 장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나라는 사방의 이민족 중 여진족을 가장 우선적인 경계 대상으로 생각했다.

여진족을 경계하며 토벌전을 펼친 명


명나라가 여진족에 대해 취한 정책은 일종의 '대테러 전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최강자인 명나라에 직접적으로 맞설 수 있는 세력은 없었고 여진족은 할거 상태였다. 그러나 명나라도 여진족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명나라는 토벌작전, 즉 일종의 대테러 전쟁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경우, 어느 정도 독자적 필요에서 여진족을 견제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명나라의 '대테러 전쟁'에 이끌려 다닌 측면이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박수윤의 <이조 무역 정책논고>에 따르면 조선 전기에 명나라에 제공된 말은 대략 5만 마리 정도다. 명나라가 조선에게 말을 요구한 것은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조선의 말이 혹시라도 여진족에 유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명사> '조선전'에 따르면, 조선 세종도 명나라에 1만 5천 필의 말을 제공한 사실이 있다. 이와 같이 조선은 명나라의 대테러 전쟁에 동원되는 과정에서 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와 연합하여 여진족을 공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명나라가 여진족에 눈을 돌리고 있는 사이에, 일본은 센코쿠 시대(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군사·경제적 실력을 강화하였다. 당시 일본은 모처럼 대륙의 견제 없이 '자기들만의 리그'를 즐길 수 있었다.

이러한 호기를 이용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센코쿠 시대를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대륙 진출을 준비했다. 그 후 일본은 조선과 명나라가 여진족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틈을 타서 임진왜란을 도발하였지만, 결국 그 어부지리는 여진족이 취하고 말았다.

역사의 교훈... '강대국의 외교 전략에 휘말리면 위험'

이처럼 여진족이 임진왜란 이후 급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명나라·일본이 모두 지쳤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경우 임진왜란을 거치며 요동 군사력을 상실했다는 점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입된 명나라 군대의 주력은 요동(만주) 군대였다. 여진족 경계에 투입되던 병력이 조선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여진족 경계에 구멍이 뚫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명군(明軍)의 제독 이여송도 요동 사람이었다. 그의 5대 할아버지는 조선에서 명으로 귀순한 사람이었다. 명군의 선봉과 주력도 요동 군대였으며, 주요 장교들도 마찬가지로 요동 출신이었다. 조선에 투입된 명나라의 병마(兵馬)와 군수 물자 역시 모두 요동에서 충당됐다.

<명사> '조선전'에는 "상실한 (명나라) 군대가 수십만 명이며 군량이 수백만 석에 달한다"고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요동 군사력에 손실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전체 국력에도 큰 타격으로 작용했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으로 요동 군사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명나라는 여진족과 싸울 힘이 없었다.

조선의 경우 국초(國初)부터 명나라의 대테러 전쟁에 이끌려 다니면서 국력을 빼앗기다가 임진왜란 때에 또다시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여진족과 싸울 여력을 상실했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14세기말부터 조선과 명나라가 여진족 견제에 정신을 빼앗긴 틈을 타서 일본은 전국통일을 거쳐 임진왜란을 도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동아시아 3국이 전쟁으로 지친 틈을 타서 최종적으로는 여진족이 패권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전전(戰前)에는 여진족 때문에 에너지를 상실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을 막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다가 결국 여진족에게 수모를 당했다.

▲조선 입장에서 보면, 명나라 주도의 '대테러 전쟁'에 이끌려 다니는 과정에서 말을 포함한 군사력을 빼앗기고 또 그 때문에 일본의 침략까지 당하다가 결국엔 여진족에게 두 번씩이나 수모를 당했다.

이러한 과거의 사례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던지는가? 그것은 자국의 국익에 별 보탬이 되지 않는 외국의 세계전략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의 대테러 전쟁 혹은 대북 압박에 동원되는 과정에서 국력의 상당 부분을 낭비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사례는 오늘날의 한국에게 중요한 시사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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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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