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4회

등록 2006.08.18 08:10수정 2006.08.1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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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각(藏經閣)을 맡고 있는 각원선사는 합장을 하며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덕분에 좋은 구경 많이 했소이다. 더구나 한번 오고 싶었던 운중보에 들르게 되어 노납은 보주께 감사드리고 있소이다."


"허허… 과분한 말씀. 청정무구의 소림에 비하면 너무 때 묻은 곳이오."

"무슨 비례의 말씀을…, 한 폭의 그림 같아 들어올 때는 잠시 넋을 놓았소이다."

언제나 저렇다. 그까짓 것 오시느라 수고했고, 경치 좋은 곳이라 말하면 그만이지 노인네들의 말이란 이렇게 장황하게 누가 말을 잘하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이다. 풍철한은 슬그머니 올라오는 하품을 참느라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들어 단숨에 마셨다.

조용한 가운데 찻잔이 딸그락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는지 보주는 시선을 돌려 고요히 앉아있는 함곡선생과 풍철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풍대협은 이런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노부가 너무 지루하게 했군."


"별 말씀을…. 두 분이 말씀을 나누시는데 버릇이 없었습니다."

풍철한은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제법 예의를 갖추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보주와 소림 최고 배분인 각원선사라면 아무리 미치광이라 소문난 그도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 없는 일.


"마시라고 가져다 놓은 차를 마셨는데 무슨 그런 말을…, 노부가 늙은 게야. 젊은 사람들 불편함을 생각해주지 않았으니…. 함곡 선생도 억지로 오시게 해서 미안하이."

"별 말씀을…, 오고 나니 오히려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지 않겠다고 버티던 함곡 선생의 대답치고는 싱거운 것이었다. 하기야 자신을 부른 운중보주 앞에서 귀찮게 왜 불렀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별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풍철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질 급한 그로서는 왜 불렀느냐고 묻고 싶지만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그 이유나 말해주고 숨막힐 것 같은 운중각에서 나가라고 했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동생이신가?"

그의 옆에 다소곳이, 하지만 차가운 표정으로 탁자 위에 놓인 찻잔에 시선을 던질 뿐 옆 사람조차 바라보지 않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 소생의 하나밖에 없는 누이입니다."

함곡선생의 말을 이어 선화란 여인이 가볍게 보주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선화입니다. 오라버니께서 동행하자고 하셔서 따라왔습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주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잘 오셨네. 젊은 나이에….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대단하구먼. 오라버니를 보호해야 하니 따라왔겠군."

혼자 말이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보주의 입에서 대단하다고 평가를 받았다면 선화란 여인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중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지만 그녀는 그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볼 뿐이었다. 특히 그녀를 바라보는 보주의 다섯 제자들의 눈에서는 또 다른 기색이 일렁이고 있었다.

"자네가 철금강이라 불리는 반대협이신가?"

보주는 금방 시선을 돌려 풍철한의 옆에 앉아 있는 반효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지목을 받자 반효는 엉거주춤 몸을 돌려 보주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반효입니다. 보주께서 무명소졸의 이름까지 기억해 주시니 일생의 영광입니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 했네. 철금강의 주먹이 무섭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지. 노부가 특별히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누가 시키는 일인데 거절할 터인가?

"소생의 힘이 닿는 일이라면 해보겠습니다."

그의 호쾌한 대답에 은근한 미소를 띄운 보주가 한 말은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의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었다.

"천근거암도 가루로 만든다는 자네의 주먹으로 본 보 입구에 있는 면철비(免鐵碑)를 가루로 만들어주게."

이건 말이 안 되는 부탁이었다. 면철비가 어떤 물건인가? 어떠한 극악한 죄를 지어도 한번만큼은 죄를 사하여 준다는 의미를 가진 물건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그저 본래의 의미였고 모든 무림인들이 보주를 존경한다는 표시로, 다른 의미로는 보주의 말이라면 어떠한 것이던 따르겠다는 의미로 만들어 세운 것이 아니었던가?

"그… 그런 일은…."

그것을 가루로 만드는 행위는 전 무림인을 모독하는 짓이고 무림인들의 공적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 면철비의 장본인인 운중보주가 시킨 일이라 하더라도 그런 짓은 두고두고 욕먹을 일이었다.

"괜찮아. 노부가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 잠시 후면 알게 될 게야. 그런데…?"

보주의 시선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반효에게서 그 옆에 앉아있는 설중행으로 넘어갔다.

"저 소협은 노부가 알아볼 수가 없군. 일행이신가?"

"그렇습니다. 앞으로 형제가 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일단 소생이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풍철한의 말에 보주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눈은 한순간 설중행의 전신을 훑고는 기이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자네의 사람 보는 안목은 소문대로 확실히 탁월하군. 훌륭한 형제를 또 하나 골랐어."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좌중의 인물들이 모두 설중행을 바라보았다. 특히 다섯 명의 제자들의 시선은 설중행을 탐색하듯 예리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제각기 달라 기이한 느낌이 들게 했다. 문득 풍철한을 보던 시선을 돌려 설중행을 보고 물었다.

"소협의 이름은 뭔가?"

"설중행입니다."

설중행은 의외로 차분했다. 그는 들어올 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보주의 고개가 가로로 저어졌다. 기대와 다르다는 표정이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군. 왠지 낯이 익기에 이름을 들어보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설중행에 대해 꽤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는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를 지웠다. 그런 모습과 다섯 제자들의 괴이한 시선을 보고 있던 풍철한은 내심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 이곳과 연관이 있는 놈인가? 보는 눈들이 다 왜 저래? 도대체 이 자식 정체가 뭐지?'

각기 달랐지만 알 듯 모를 듯한 그들의 시선에 풍철한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저 오늘 새벽에 협박과 공갈로 토해내게 한 말만 가지고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운중보주의 어투에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이 전달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일일이 내력을 확인한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함이었네. 풍대협의 두 형제는 언제쯤이나 도착할 것 같은가?"

"연락 받기로는 내일 오전쯤이나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기다릴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일을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군."

그는 잠시 말을 끊고는 다시 한번 좌중을 쭉 둘러보았다. 그저 시선을 던지는 것에 불과한데도 그 시선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이 모두 드러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무슨 일이 있기에 보주와 같은 인물이 이리 뜸을 들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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