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 시인 집 부엌문에 걸려 있던 낫과 호미.정판수
산책길로 가다 보면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밭이 몇 다랑 있는데,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게 성산댁 할머니밭이다.
최근에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우리 부부는 감탄을 한다. 밭까지 이르는 약 이십여 미터의 길이 무성한 풀밭이었는데, 며칠 전 할머니가 낫으로 깨끗하게 베어 길이 훤해진 것이다.
얼마나 예쁘게 깎아놓았는지 처음 보았을 때, 아내가 "낫질 솜씨가 완전히 예술이네"라고 하였다. 정말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표현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곱게 깎여 있었다.
요즘 달내마을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는 매미울음 소리도, 경운기 소리도 아닌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다. 다들 논둑이나 밭둑에 무시로 나는 풀들을 베느라 가만히 앉아 쉴 틈이 없다. 예닐곱 남짓한 할아버지들이 번갈아 가며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하며 기계음을 들려준다.
할아버지들은 낫을 사용하지 않고 다들 예초기로 벤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요즘은 낫을 사용 않고 예초기로 다 베나 보지요?" 하니, "낫으로 이 많은 걸 언제 다 베려고…" 하신다.
그러니까 편리함과 능률 면에서 낫보다 예초기를 선택한 것이다. 아마 할아버지들 중에 성산댁 할머니보다 더 낫질을 잘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른다. 그래서 만약 낫으로 사용한다면 더욱 예쁘게 베어 낼 수 있을지도….
성산댁 할머니는 혼자 사신다. 예초기를 사용할 줄 모르시니 누가 베어주지 않으면 낫으로 벨 수밖에 없다. 할머니의 심정을 읽는다면 예초기를 사용하는 다른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남편 안 계신 게 서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낫으로 베어낸 모양은 예초기로 베어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낫으로 베어낸 모습이 하도 고와 가까이 다가가 예초기로 벤 것과 비교해보았다. 언뜻 보면 같아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차이가 드러난다.
예초기는 깎아야 할 땅이 아주 고르다면 낫과 차이가 크게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평평한 땅이 그리 많은가. 특히 논둑이나 밭둑은 나고 듦이 많다. 그런 곳에 예초기는 수평으로 깎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겉으로 보기엔 제대로 깎인 것 같은데 나온 곳은 아주 많이 깎이고, 들어간 곳은 웃머리만 조금 깎일 뿐이라 멀리서 보면 깎인 부위의 빛깔이 다르다.
그와 달리 낫으로 베면 굴곡에 상관없이 깎을 수 있다. 들어간 데는 들어간 데로 나온 데는 나온 데로 깎으면 되니까. 그래서 멀리서 보더라도 깎인 부위의 빛깔이 같다. 그러니 성산댁 할머니가 낫으로 깎은 길이 유난히 눈에 띌 수밖에.
요즈음 머리 자를 때면 남성전용 미용실을 찾아간다. 예전에는 단골 이발소를 이용했다. 그 단골 이발소의 사장은 기계(속칭 '바리깡')를 거의 사용 안 하고 가위로만 손질했다. 그럴 때 손놀림은 가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빨랐다. 더 길거나 짧은 머리카락이 없는 것 같은데도 손놀림을 쉬지 않았다.
그 이발사가 시내로 옮기고 난 뒤 다른 이발사가 왔는데, 이 이발사는 가위보다 기계를 더 많이 사용했다. 언뜻 보기에 전과 다름없는 것 같았는데도 깎고 나면 확실히 달랐다. 뭔가 개운한 맛이 전보다 뒤떨어진 느낌이었다. 결국, 그곳 대신 남성전용 미용실로 가게 된 이유다.
나는 어릴 때 지게도 져 봤고, 목갱이도 웬만큼 다룰 줄 알고, 톱질도 꽤 하는데 낫질만은 아주 서툴다.
우리 집 들어오는 길목을 제외하고 앞뒤와 양옆이 모두 언덕이다. 게다가 경사가 심한데다 군데군데 나무 등걸이 있어 예초기 사용이 어렵다. 그러면 낫을 사용해야 한다. 몇 번 해보았는데도 잘 안 된다.
앞으로 이런 이유 말고도 낫질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 웬만한 두께의 나무는 톱보다 도끼보다 낫으로 꺾는 게 수월타. 대나무 다듬고, 나뭇가지를 치고, 뭘 만들 때 낫으로 마무리해야 때깔이 난다. 예전에는 연이나 팽이나 아이들 공작품은 다 낫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달내마을에서도 어르신들이 낫을 사용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한가윗날 제상에 올리는 멧밥만은 낫으로 베어낸 벼로 짓는다. 쌀 '미(米)'자를 파자(破字)하면 '八十八'이 되듯 여든 여덟 번의 수고 뒤 첫 수확은 바인더나 콤바인 같은 기계 대신 낫으로 벤다.
또 묏등에 벌초할 때도 마찬가지다. 결국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일에는 낫을 사용하는 것이다.
농촌 생활을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라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간을 내 낫질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순전히 성산댁 할머니의 예술품 때문이었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 ‘달내마을 이야기’에 나오는 ‘달내마을’은 경주시 양남면 월천마을을 달 ‘月’과 내 ‘川’으로 우리말로 풀어 썼습니다. 예전에는 이곳이 ‘다래골(다래가 많이 나오는 마을)’ 또는 ‘달내골’로 불리어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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