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33회

등록 2006.09.14 08:24수정 2006.09.1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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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서두르는 역할은 자신이어야 했다. 그가 서두른다면 문제가 생긴다. 자신이 서두를 때 제어해야 할 사람인 함곡이 서두른다면 제어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뿐이다. 그 때문에 무례해 보일지 몰라도 자신이 나선 것이다.

"자네까지?"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지 않습니까? 이곳에 성곤 어른도 와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오늘 저녁 이 자리에 성곤 어른께서도 모습을 보이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성곤 어른께서 두문불출하실만한 일."

"……!"

"더구나 오후에 들어 온 배에서 제일 나중에 내린 분은 철기문의 신기수사(神機秀士) 옥청량(玉淸亮) 대협이셨습니다. 좀처럼 표정을 내보이시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너무 침중하시더군요."

신기수사(神機秀士) 옥청량(玉淸亮)은 혈간 옥청천의 세 형제 중 막내 동생이다. 지모가 뛰어나 철기문의 두뇌로 통하는 그는 형 옥청문과 더불어 철기문을 명문거파로 성장시켰다. 보주는 고개를 끄떡였다.

"역시 노부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하여 자네들을 선택한 것 말일세."


"과찬이십니다."

풍철한은 과장스럽게 포권을 취하며 머리를 숙였다. 분명 장난기가 있는 것이었지만 보주는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옥기룡을 바라보았다.


"네가 설명해 주겠느냐?"

옥기룡은 침중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사부님. 그 일은 본 보 내에서 일어난 사건도 아니고 아직 이번 사건과 연관도…."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보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서 항거할 수 없는 느낌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아무리 자신의 감정이 격해 있다고는 하나 사부의 명에 조금이라도 거부하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못했습니다. 사부님."

보주는 침중한 얼굴이었지만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야단을 치지 않은 것 같은 태도였다. 옥기룡은 가볍게 함곡과 풍철한에게 포권을 취했다.

"너무 뜻밖이고 충격적이라 말씀드리기 거북해서 그랬으니 용서하시길…."

"별 말씀을…."

풍철한과 함곡이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자 옥기룡의 눈자위가 조금 붉어졌다.

"백부님께서 이곳으로 오시는 도중 누군가의 기습을 받고 변을 당하셨다 하오."

"백부님이라면 혈간 어른을 말씀하시는 거요?"

"그렇소. 사흘 전 건덕(建德) 부근에서…."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동정오우 중 한 사람이자, 철기문의 문주 옥청문의 형이다. 옥기룡에게 있어서는 부친만큼이나 각별한 정을 가졌던 인물이다. 옥청천 역시 가정을 가져보지 않은 관계로 옥기룡에게 친자식 이상으로 각별한 정을 쏟았다.

"세상에… 누가 감히 혈간 어른을 시해할 수 있단 말이오?"

함곡이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반문했다. 동정오우는 삼십 년 전부터 최고의 고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십육 년 전부터 자신의 병기를 사용할 기회조차 없었던 인물들이다. 그들이 중원을 품에 안던 날 있었던 마지막 혈전에서 사용한 이후로 그들에게 도전할 인물은 이 중원에 없었다.

하지만 함곡은 말을 해놓고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미 운중보 내에서 동정오우 중 하나인 철담이 살해되었다. 자신이 그의 시신을 확인까지 했다. 중원최고의 고수인 운중보주가 있는 곳에서, 더구나 철담은 자신의 거처인 매송헌에서 살해되었다.

"내일 오후나 모레면 백부님의 시신이 도착할 것이오."

옥청천의 시신이 철기문으로 가지 않고 운중보로 온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장례는 마땅히 자신의 가문과 문파에서 치러야 한다. 보주의 뜻이었을까? 아니면 철기문의 결정이었을까? 함곡은 보주와 옥기룡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버님의 뜻이셨소. 백부님께서는 형제보다 친구 분들을 더 좋아하셨으니 오랜 만에 친구 분들이 모이는 자리에 시신이라도 참석하는 것이 백부님의 바램일 것이라 하셨소."

함곡의 눈에 떠오른 미세한 의혹스러움을 모를 옥기룡이 아니었다. 아마 혈간 옥청천의 막내 동생인 신기수사 옥청량이 이리 급하게 온 것은 그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곡은 내심 혀를 차고 있었다.

'자식이 운중보의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시신으로나마 그 역할을 해주길 바라고 한 짓이겠지. 옥청문은 정말 무서운 자로군.'

혈간의 장례를 철기문에서 치루게 된다면 아마 옥기룡은 철기문으로 돌아 가봐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운중보주는 철기문에 가게 될까? 친구이니 당연히 가봐야 하겠지만 이미 이곳엔 그의 회갑을 축하해 주기 위해 많은 손님들이 와 있었다. 그런 그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회갑연이 끝난 후 친구들과 함께 갈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미 공표한 바와 같이 이번 회갑연을 치루면서 후계자가 정해지게 될 것이다. 곁에 있어도 불안한 마당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우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시신은 인간에게 무한한 동정을 일으키게 한다. 평생을 같이 한 친구의 시신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중대한 일을 결정하게 만들 수도 있는 요인이었다.

만약 후계를 다투는 사형제 간의 음모에 의해 옥청천이 시해된 것이라면 그의 동생 옥청문에 의해 그들이 바라는 결과가 아닌 정반대의 결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누굴까? 누가 옥청천을 시해한 것일까?'

함곡과는 반대로 풍철한은 혈간이 살해되었다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버릇처럼 그의 뇌리를 스치는 환영이 있었다. 섬광과도 같이 스쳐가는 환영.

그리 크지 않은 배 위에 여러 명의 시신이 나동그라져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마주선 인물 중 하나가 기쾌하게 손을 뻗는 순간 투명한 선이 쏘아나가고, 혈간의 이마에 미세한 혈흔과 한 방울의 핏방울이 맺히며 쓰러지는 광경이었다. 마치 철담 하후진의 시신에서 보았던 바로 그 사인(死因)과 똑같았다.

그 이전인지 아니면 동시였는지 또 누군가가 혈간의 가슴에 기이한 장력을 날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혈간은 경악스런 얼굴로 그 두 가지 공격에 쓰러졌다. 그리고 혈간을 쓰러뜨린 자는 설중행과 바로 설중행을 도와준 인물이라고 짐작되던 부교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바로 그 자인 것 같았다.

'내가 지나친 환상을 보는 것일까?'

설중행은 철기문의 구천각 인물들에게 의해 쫓기고 있었고, 시기 역시 혈간이 사흘 전에 살해 되었다면 맞아 떨어졌다. 자신의 협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을 돌보아 준 성의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오늘 새벽 설중행은 자신에게 아주 일부이지만 그 자신에 대해 털어 놓았다.

비밀조직에 몸담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조직을 밝힐 수는 없노라고. 다만 이제 그 조직은 더 이상 존재치 않을 것이고, 자신 역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미 자신의 조직원 전부가 죽었을 것이란 말을 하며 자신들을 함정에 몰아넣은 그 조직의 수뇌만큼은 반드시 죽이겠다고 했었다.

(분명해. 그들이 노렸던 인물은 바로 혈간이었어. 그 와중에 자신의 조직원이 전부 죽었을 것이고, 그 역시 쫓기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과연 설중행이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였다 하더라도, 또한 조직원 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혈간을 살해할 능력이 있을까? 물론 그가 운중보주의 독문무공인 심인검(心印劍)을 익혔더라도 과연 혈간을 죽일 수 있었을까?

"누군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흉수가 밝혀진다면 그 배후까지 철저히 파헤쳐 개미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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