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32회

등록 2006.09.13 08:16수정 2006.09.13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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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행은 현무각의 좌측을 돌아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숲 속으로 들어섰다. 길이 없는 듯 했지만 바위 위에는 미세하나마 발길이 닿은 흔적이 있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시녀가 남의 눈을 피하여 몰래 전해 준 쪽지에는 자신 만이 아는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무를 잡고 돌자 이미 어둑해지기 시작한 숲 속에서 길을 찾기 어려웠다. 아니 본래부터 길이 없었기에 더욱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력이란 놀라운 것이어서 그는 꽤 오랜 시각 동안 잊어버렸던 장소를 찾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더디었지만 곧 그는 능숙하게 나무 사이를 누비며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자신만이 유일하게 아는 곳이라 생각했었다. 알 수 없는 슬픔이 복받칠 때면 이곳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폭포를 보며 앉아 있었다. 그리 높지 않고 폭포였고, 그리 깊지 않은 웅덩이일 뿐이었지만 웬일인지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격한 감정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이곳에 당도했을 때 자신 만이 아는 공간에 누군가가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닥까지 보이는 맑은 물 속에서 하얀 나신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선녀라도 내려 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어린 그에게 그것은 아주 충격적인 모습으로 인해 선녀가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선녀의 얼굴은 자신에게 익숙한 여자의 얼굴이었다.

바위.
일장 여 높이의 폭포가 떨어지는 좌측에는 비교적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하얀 나신은 그쪽으로 가 온 몸을 드러냈다. 물방울이 묻어 있는 여인의 나신(裸身)은 아직 여자가 무엇인지 모를 그에게 심장이 요동치고 하초가 부풀어 오르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숨이 목에 턱턱 걸렸다.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흘러내린 물방울이 주발을 얹어 놓은 듯한 두개의 탐스런 가슴 사이의 계곡을 타고 흐르고, 가는 허리 가운데 있는 앙증맞은 배꼽에 잠시 머물렀다가 윤기가 흐르는 아랫배의 체모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바위 위에 뉘여진 나신은 어느 순간부터 계곡물을 타고 오르는 백린(白鱗)처럼 파드닥거리고 길게 늘어진 다리는 자꾸 꼬였다. 물방울이 따라 흘러 촉촉하게 적셔진 그곳에 뼈가 없는 듯한 희고 긴 손가락이 덮이고, 그 손가락은 자꾸 체모를 헤집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과 잘근거리는 입술 사이로 뜨거운 한숨이 들락거리고, 부드럽게 요동치는 젖가슴은 또 하나의 희고 긴 손에 의해 일그러지고 있었다.

나신은 어떤 때는 부드럽게, 어떤 때는 격렬하게 움직였다. 희고 긴 손가락의 어느 것은 체모 속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고, 길고 매끄러운 다리는 격렬하게 꼬이고 벌어지기도 했다. 가끔 벌어지는 다리가 만나는 그곳에 언뜻 보이는 붉은 속살 사이로 희고 긴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도 보였고, 일그러진 젖가슴을 뭉개지도록 잡아 비트는 것도 보였다.


달 뜬 신음이 앵두 같은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횟수가 많아졌다. 도리질을 치는 머리로 인해 젖은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목이 꺾이고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다고 느낄 때쯤 격렬하게 움직이던 손놀림과 나신의 기묘한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녀의 아랫배가 쉴 새 없이 크게 기복을 일으키고 허리가 뒤로 꺾이는 듯 했다. 매끄럽게 조각한 듯 길게 늘어진 다리와 발끝이 일직선이 되며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그는 눈을 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수록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뇌리에서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충혈된 눈으로 나신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리 속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달 뜬 신음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자신이 숨어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해운(解雲)....! 재미있었니?”

그녀는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더니 적나라한 나신으로 물을 가로질러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달짝지근한 숨을 내쉬면서......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고, 큰 잘못을 한 듯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느새 다가든 매끄럽고 부드러운 젖가슴이 그의 얼굴을 덮자 아직 식지 않은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며 기이한 육향이 그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젖을 찾는 아이의 본능처럼 그녀의 젖꼭지를 찾아 미친 듯 빨아대자 달 뜬 신음과 함께 그녀의 몸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

그는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를 뚫고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래... 해운. 너였어. 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도 나는 너의 눈빛을 잊지 않아.”

바로 그녀였다. 어느새 등 뒤에 다가와 그를 뒤에서 살포시 껴안는 그녀의 입술은 설중행의 귓가를 간질이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언제나 서향(瑞香)이 풍겼다. 그녀의 몸에서도 언제나 서향이 은은히 맡아졌다. 자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천리향(千里香)이라고도 하는 그녀의 서향에 익숙해 진 곳도 바로 이 자리였다.

그리고 지금 그의 귀를 간질이는 그녀의 입에서도, 뭉클한 느낌이 들도록 앞가슴을 그의 등 뒤에 밀착시키는 그녀의 몸에서도 왈칵 서향이 맡아졌다.

20

육품대채(六品大菜)로 시작한 저녁은 네 가지 야채와 새우, 해삼, 연와(燕窩), 어시(魚翅)의 네 가지 생선 류, 그리고 닭, 오리, 돼지, 소의 네 가지 육류로 만든 홍소어시(紅燒魚翅), 연와팔선압자(燕窩八仙鴨子), 향수전압(香脩全鴨) 등으로 이어졌다. 배가 불러도 입에 들어간 음식은 살살 녹아 목을 타고 넘었다.

술은 장원홍(狀元紅)이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유일하게 풍철한과 함곡의 여동생 선화 두 남녀뿐이었다. 보주의 대제자인 장문위와 옥기룡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다. 반효 마저도 식사 후엔 고약한 일(?)을 하게 될 것 같자 술 맛이 떨어졌는지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입에 맞는가?”

수저를 내려놓는 함곡을 보며 물은 말이었다. 보주는 본래 소식(小食)을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식욕이 떨어졌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극히 적은 양을 먹었다.

이채로운 것은 그의 뒤로 허공에 걸린 금으로 만든 새 조롱이었다. 두 마리의 금사작(金絲雀)이 그 안에 있었는데 언뜻 한 쌍의 금사작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나는 크고, 또 하나는 너무 작았기 때문이었다. 한 쌍이 아니라 어미와 새끼인 것 같았다. 바로 상만천이 가져 온 예물 중의 하나였다.

“두 번인가 가 보았던 소주(蘇州)의 만춘루(滿春樓)가 생각나게 하는군요. 너무 맛이 있어 과식했습니다.”

“정말 대단하네. 자네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을 뿐 아니라 뛰어난 미각까지도 가졌군.”

보주는 감탄한 듯 했다. 만춘루는 소주에서도 세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반점이었다.

“얼마 전에 아이들이 노부를 위해 만춘루의 숙수를 데려왔다네. 하지만 그것마저도 노부의 잃어버린 미각을 되찾게 하지를 못하는군.”

아마 제자 중 누군가가 사부의 회갑연을 위하여 만춘루의 숙수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철담의 죽음으로 인해 식욕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일 뿐만은 아니시겠지요?”

밑도 끝도 없는 함곡의 말에 보주는 찻잔을 들었다가 조용히 함곡을 응시했다. 그가 무엇을 더 알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것 같았다.

“왜 그리 생각했는가?”

풍철한은 금으로 만든 새 조롱을 보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금사작을 보면서 그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 잡혔다. 분명 금으로 만들어진 두 마리의 참새지만 그것은 왠지 슬픈 느낌이 들게 했다.

“이 친구의 눈치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좀 둔한 소생도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으니 이 친구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겁니다.”

함곡이 대답하기 전에 풍철한이 끼어들었다. 함곡은 일을 서두르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까 상만천과 함께 들어 온 용추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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