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멈추고 시골생활에 뛰어들다

꾸벅새가 선물한 인도 여행 12

등록 2006.09.19 14:24수정 2006.09.1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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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희

왕소희
카주라호의 앨범 속에는 추억과 따뜻함이 있다. 수상한 음악 쇼의 사회자인 람과 요가선생님인 가넨들, 한국인 여행자 진과 영, 그리고 나는 카주라호를 함께 여행했다. 우리는 람의 삼촌 집에 머물면서 가족들과 축제를 함께 했다. 디왈리의 마지막은 시스터 축제로 여자형제가 남자형제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해준다.

아침 일찍부터 문 앞엔 소똥으로 빚은 작은 모형이 놓여있었다. 부엌 모양에 우유와 꽃을 뿌린 것이었다. 이것은 여자들의 축제여서 부엌을 신성시하는 듯 했다. 나이가 제일 많은 할머니께서 여자들을 불러모아 덕담을 하시며 꽃과 성수를 손목에 뿌려주었다.


왕소희

"나마스떼(안녕하세요~) 나마스떼(안녕하세요~)."

집 앞 새장 속에는 앵무새가 있었다. 인도에는 널린 것이 앵무새지만 이 녀석은 조금 특별했다. 힌디를 어찌나 잘하는지 선생님으로 모시고 싶을 정도였다.

왕소희
오후에 우리는 들판을 가로질러 오두막 사두를 찾아갔다. 거기엔 오두막 사두가 7년에 걸쳐 지은 3층 짜리 오두막이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가자 집이 흔들흔들 거렸다.

"어머머! 집이 흔들려요!"
"노 프라블럼! 노 프라블럼!"

아래서 따라오던 그는 반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이곳은 명상하기에 최적의 장소 같았다. 흔들흔들 거리니 정신이 바짝 들 수밖에.


왕소희
밤이 깊어지자 삼촌께서 하모니엄(건반 악기)을 들고 오셨다. 전혀 노래를 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시작한 수줍은 노래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그가 평생 동안 작곡한 곡은 두 뭉치나 되었다. 흥이 난 우리는 망가진 하모니엄 뚜껑을 앞에 두고 박자를 맞추기도 했다. 람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인도여인처럼 엉덩이를 꼬며 춤을 추었다. 사람들의 폭소와 박수가 이어지고 밤이 저물어 갔다.

그들과 헤어져 델리로 떠났지만...


디왈리 축제가 모두 끝나고 그들과 헤어져 델리로 떠났다. 나는 자인교 사원의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

"오르차로 돌아가."

보글거리는 곱슬머리를 뒤로 젖히며 충고하던 파비앙이 떠올랐다. 사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국적이면서 슬픈 듯 했다. 그곳은 델리였다. 맞은 편 골목에서 패럿(족제비과 동물)이 달려와 반대 편 골목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델리는 도시였지만 동물원에서나 볼 법한 패럿들이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어떡하면 좋지?’

식어버린 짜이(밀크티) 계단 위에 올려놓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파비앙은 델리의 한 펍(빠의 일종)에서 만난 이태리 반지 디자이너였다. 우린 서로 만화와 음악이야기를 하다가 친해졌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보노보노(만화)를 알았고 나는 그의 ACDC(락그룹)를 알고 있었다. 언제나 유쾌한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난 인도를 돕는 인도인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어. 내가 인도로 간다고 했을 때 모두들 인도 사람을 조심하라고 하더군. 인도가 처음은 아니지만 인도인들이 조금 무섭긴 했어. 내가 어렸을 때 북한 사람들은 정말 늑대라고 생각한거랑 똑같지. 만화에서 북한 사람은 모두 늑대였거든. 인도 사람도 다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나봐. 인도를 돕고 있는 그는 내가 보기에 정말 특이한 인도인이었어.”

왕소희
"맞아. 말 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이지. 네가 말한 람이라는 사람처럼 말이야. 개인적인 삶을 떠나서 모든 열정을 다른 사람을 돕는데 바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지. 하지만 한 사람의 힘이 큰 숲을 이루었잖아. 그가 돌 하나 하나를 쌓아올려 건물을 만들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그 학교 말이야. 덕분에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인생이 끝났을 가난한 아이들 80명이 교육을 받게 됐잖아.”

파비앙은 맥주를 들이키면서 아직 따뜻한 난(구운 밀떡)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사람을 돕고 싶지만 난 평생 남을 돕는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 그리고 난 두려워. 그 사람을 봤을 때 영혼을 읽을 수 있다고 느꼈어.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야.”
“메이, 그런 일은 흔하지 않아. 그리고 난 그런 일들을 믿어. 삶에 숨어있는 신비들 말이야.”

파비앙의 열 손가락에는 특이한 모양의 갖가지 반지들이 끼워져 있었다. 그 반지 디자인만큼 그는 자유로운 생각의 소유자였다.

“그 사람이 가진 것은 옷 한 벌 뿐이야. 하지만 누군가 그를 돕는다면 더 많은 일들을 해 낼 수 있겠지. 가서 그를 도와줘. 모든 인연이 과학이라는 사실을 아니. 메이? 모든 일은 그냥 일어나지 않아. 의식이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은 정신의 과학이야. 그가 그토록 인도를 사랑했기 때문에 신이 너를 그곳에 보냈는지도 모르지. 가벼운 마음으로 가서 네가 할 수 있을 일을 해.”

“하지만 여행자가 여행을 멈추다니! 여행을 하고 돌아가면 안 될까? 여행자가 여행을 멈추어도 돼?”
“아. 메이 제발! 시간 낭비하지 마”

파비앙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부벼놓았다.

며칠 뒤 나는 오르차로 돌아가기 위해 릭샤를 타고 델리 기차역으로 향했다. 파비앙이 보석들을 구입한다고 라자스탄으로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등장 순서와 대사를 안다는 듯 나타나 나를 지지해준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11월의 델리엔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내 팔 위에 부서지는 햇볕 만 보고 있어도 즐거웠다. 나는 늘 여행을 믿어왔다. 여행은 언제나 우리를 좋은 곳으로 데려 간다는 것을.

이번에도 그랬다. 누군가 날 위해 이 여행을 준비해 둔 것처럼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과 만나고 있었다. 삶이 반짝 반짝 빛났다. 기나긴 인도 시골 생활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왕소희

덧붙이는 글 | <미디어다음> <행복닷컴>에 함께 연재중입니다.

덧붙이는 글 <미디어다음> <행복닷컴>에 함께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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