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자 로스 먼로(R. Monro)가 1992년 가을호 <폴리시 리뷰>에서 "아시아의 위협은 중국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한 이래 '중국위협론'이 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물론 중국으로부터 어떤 뚜렷한 위협이 당장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미·일 양국이 정치적 목적으로 '중국위협론'을 과장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의 잠재력이나 성장 추세로 볼 때에 '중국위협론'은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경보신호'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가장 가까운 한반도로서는 중국의 동태에 대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러한 논의가 중국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취하자는 취지가 아님을 명확히 밝혀 두고자 한다. 건전한 한중관계의 지속적 발전은 한국에게 분명 국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등잔 밑일수록 오히려 더 밝게 해야 하는 것처럼 아무리 우방이고 동맹일지라도 중국이 한국을 향해 대외팽창을 도모할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언급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우방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중국의 위험도를 예측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그중 한 가지만 다루기로 한다. 그것은 바로 중국 지식인들의 '지적 동향'이다. 중국 지식인 사회의 지적 동향을 파악함으로써 중국인들의 대외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중국인들의 대외 인식을 엿봄으로써 중국 대외정책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대외정책에서는 팽창과 수축의 끊임없는 순환이 발견된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팽창적 혹은 투쟁적'인 것과 '수축적 혹은 평화적'인 것의 반복적 순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논의의 편의상 단지 팽창과 수축의 순환이라고만 하기로 한다.따라서 이 글에서 사용되는 팽창이라는 표현 속에는 투쟁적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며, 또 수축이라는 표현 속에는 평화적이라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폭력에 의한 지배'에서 '지식에 의한 지배'로
팽창과 수축의 순환은 진나라 및 한나라 시대에도 발견되는 대외관계상의 특징이었다. 그 한 예로 5대 군주인 문제(재위 BC 180∼BC 157) 때에 수축의 양상을 보이던 한나라의 대외정책이 7대 군주인 무제(재위 BC 147∼BC 87) 때에는 두 차례의 큰 변화를 보인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공(BC 109)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시기는 한나라의 대외정책이 수축에서 팽창으로 바뀐 시기였다. 그러다가 BC 82년에 한사군 중 진번·임둔 2군이 철폐된 것은 이 시기에 한나라가 팽창에서 수축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송나라(북송+남송, AD 960∼1279) 시기에 사대부(士大夫) 사회가 정착되면서부터 지식인들의 지적 동향이 대외관계를 가늠하는 척도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중국의 정치권력은 '폭력에 의한 지배'를 '지식에 의한 지배'로 은폐하는 세련된 정치권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특징은 내정(內政)뿐만 아니라 외정(外政)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났다. 송나라 이후의 한족 정권은 대외관계에서 대체로 평화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부분적으로는 전쟁행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평화적인 대외정책을 보여 주었다.
이 같은 중국의 대외정책은 사회 주도세력인 사대부들의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송나라 이후 사대부 사회에서는 대체로 주화파(主和派)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주전파(主戰派)가 이따금씩 주도권을 장악한 적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주화파의 우세가 훨씬 더 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중국이 주화(主和)에서 주전(主戰)으로 바뀔 때에는 지식인 사회에서 그 징후가 미리 나타났다. 그 징후라는 것은 악비(岳飛·1103∼1141)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긍정적 재평가다. 악비는 북송-남송 교체시기에 금나라(여진족 출신)의 침략에 맞서 한족 정권을 지키기 위해 대외 항쟁을 전개한 인물이다.
외세와 싸워야 할 때 띄우는 대외항쟁의 영웅 '악비'
지난 5월 26일자 기사인 <중국판 이순신, 악비가 홀대받는 이유>에서는 악비 재평가 문제를 중국의 국가통합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보았지만, 이 글에서는 중국의 대외정책 문제와 관련하여 이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검토하기로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상시에는 주화파가 주도권을 장악한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주전파가 새로운 주류로 떠오를 때에, 그것을 미리 가늠하게 할 수 있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바로 악비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었다. 중국이 충분한 내적 실력을 갖추었거나 혹은 중국이 외세를 상대로 투쟁을 해야 할 때에는 지식인 사회에서 악비를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곤 했다.
악비가 살았던 때인 송나라 시기만 해도 악비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 시기에는 주화파인 진회(秦檜·1090∼1155)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는 송나라 시대의 지식인들이 대외관계상의 변화보다는 안정을 더 희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시기인 원나라 때에도 악비에 대한 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몽골족 치하에서 한족 출신의 '투사'인 악비가 부각될 리는 만무하였던 것이다.
악비가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명대에 들어온 이후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토목(土木)의 변(變)' 이었다. 명나라 6대 군주인 영종(정통제·재위 1435∼1449년)이 '오이라트'라는 몽골 부족의 포로가 된 '토목의 변'은 다음과 같은 사건이었다.
명나라의 주원장(朱元璋·1328∼1398년)에 패해 중원(中原)을 상실한 1368년 이후의 몽골 정권을 북원(北元)이라고 한다. 그런데 1440년경 오이라트 부족의 에센(也先)이 전 몽골의 실권자가 된 이후로 오이라트 부족은 중국 변경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명 영종은 친정(親征)을 결심했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이라트 군대에 대항했다. 하지만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회군을 결심한다. 그런데 회군하던 중 토목(土木·지금의 허베이성 소재)에서 오이라트 군에게 대패하여 급기야 포로가 되고 만다. 이때가 1449년이었다.
중국 민족의 영웅 '악비'가 최근 추락하는 이유는?
송나라 때에 죽은 악비가 재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바로 토목의 변을 계기로 한 것이다. 명나라 황제가 이민족인 몽골 부족에게 포로로 사로잡히는 치욕을 당하자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는 대외항쟁의 영웅인 악비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강경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당시 명나라 정부는 자국 황제가 포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에 대해 강경책을 구사하였다. 한편, 오이라트 부족의 에센은 명나라 황제를 송환하는 대신 그에 상당하는 반대급부를 받아내려 하였다.
하지만, 명나라 정부에서는 경제(景帝·재위 1449∼1456년)를 새 황제로 옹립하고 영종 정통제를 상황(上皇)으로 밀어냈다. 오이라트 부족의 요구를 결코 들어줄 수 없다는 강경 메시지였다.
이에 분노한 에센이 명나라를 침략하여 한때 북경까지 포위하였으나 명나라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였다. 결국 에센의 오이라트 부족은 퇴각하였고, 영종 정통제는 1450년에 조건 없이 석방되었다.
악비를 재조명하는 사회 분위기답게 중국 정부에서도 강경한 대외정책을 구사하였고, 그 덕분에 영종 정통제의 조건 없는 무사 귀환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송나라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악비는 이처럼 명나라가 북방 몽골족에 의해 수모를 당한 토목의 변 이후로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대외 강경책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죽은 악비'가 살아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럼, 다음 왕조인 청나라 때에는 악비가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또 현대 중국에서 악비가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최근에 와서 악비의 위상이 다시 추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중국의 분위기는 중국의 대외정책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을까? 그 점에 관하여는 하편에서 계속 논의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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