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이래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는 대개 주화파(主和派)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다가 대외적 팽창의 필요성이 있을 때에는 대금(對金) 항쟁의 주역인 주전파 악비(岳飛·1103∼1141)가 재조명되고, 그에 따라 악비의 라이벌인 진회(秦檜·1090∼1155)는 상대적으로 추락하였다. 특히 명나라 때에는 제6대 군주 영종 정통제가 몽골 부족에게 포로로 잡힌 '토목의 변'(1449년)을 계기로 주전론이 대세를 이루면서 악비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중국 사회에서 악비 재평가 문제는 중국 대외정책의 향방을 가늠하게 하는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그럼, 청나라 때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은 어떠할까? 이번 기사에서 그 점을 다루기로 한다. <필자 주>
명나라 때에 '토목의 변'을 계기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악비의 인기는 청나라가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악비가 맞서 싸운 금나라(여진족)가 바로 청나라 만주족의 조상이었기 때문이다. 만주족 조상인 여진족에 대항해 싸운 한족의 악비가 만주족 정권 하에서 숭상되기는 힘들었다. 중국 내부의 종족 감정 때문에 악비는 청나라 시절에는 영웅으로 부각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청나라가 '섬나라' 일본에게 치욕적 패배를 당한 청일전쟁(1894년)을 계기로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는 악비가 또다시 '스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족이냐 만주족(여진족)이냐 하는 중국 내부의 종족 감정이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일단 수면 속으로 잠복해 들어간 것이다. 그에 따라 주화파들의 '주가'는 또다시 '바닥'을 치게 되었다. 그리고 악비의 라이벌로서 주화파의 대명사인 진회가 천하의 매국노로 매도되었다.
청일전쟁 계기 악비 다시 '스타'로 부각
여진족의 금나라가 송나라를 압박했을 때에, 금나라와의 확전을 주장한 인물은 악비이고 그 반대로 확전을 반대한 인물은 진회였다. 이때 진회는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엄청난 대가만 치를 뿐"이라면서 악비를 정치적으로 압박했다. 결국 악비는 진회의 '모함'으로 1141년에 투옥되었으며 나중에는 처형까지 당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주전론이 주류를 이룬 시대에는 진회는 '민족 영웅 악비를 죽음에 내몬 간신배'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조선의 이순신과 원균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반드시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한국에 초빙교수로 와 있는 중국 청화대학 역사학과 교수의 최근 코멘트에 따르면, 악비와 진회가 라이벌 관계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각각 개별적으로 재조명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악비가 재조명되면 그에 따라 진회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악비-진회 재평가 문제의 주축은 어디까지나 악비 재평가라는 것이다.
주화론이 대세를 이루는 평화적인 시대에는 진회를 포함한 주화파들이 일반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는다. 이런 경우에 진회가 특별히 부각되는 것은 아니다. 주화론자들 일반이 인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다가 주전론으로 바뀌게 되면, 악비가 새롭게 조명을 받으면서 민족 영웅으로 부각된다. 그 결과로, 진회는 ‘악비를 죽인 간신배’라는 멍에를 쓰고 사회적 비난의 십자포화를 받는다. 그러다가 다시 주화론으로 바뀌게 되면, 악비를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사그라지면서 진회를 죄악시하는 분위기도 사그라진다. 그러므로 악비와 진회가 라이벌 관계이기는 하지만, 양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악비 재평가를 핵심 축으로 하여 전개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청일전쟁 패배 이후 악비가 숭상되고 진회가 매도되었다. 서양 강국도 아닌 동아시아의 변방 일본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데 대한 대응 심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20세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는 대외 항쟁이 핵심 과제가 된 20세기 중국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악비에 대한 20세기 중국인들의 지지 열기는 악비 동상과 진회 동상에 대한 중국인들의 상반된 태도에서도 잘 드러났다. 악비 동상은 당연히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에, 악비 동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진회 부부의 동상'은 정반대의 대우를 받았다. 현대 중국인들은 진회 부부의 동상에다가 침을 마구 뱉었다. 악비와 진회가 현대 중국인들로부터 얼마나 대조적인 대우를 받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악비 라이벌 진회, 당당히 일어서다
그런데 최근 들어 중국 사회의 분위기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악비의 위상이 원위치 되는 것과 동시에 진회도 도로 복권되고 있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진회 동상의 변화다. 예전에는 진회 부부가 꿇어앉은 동상이 조각되었지만, 최근에는 진회 부부가 '당당히' 일어서 있는 동상이 조각되어 중국 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것은 악비가 대항해 싸웠던 여진족(만주족)을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 적극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측면을 담고 있는 것인 동시에, 중국 지식인 사회가 대외정책 측면에서 주화적(主和的) 분위기로 옮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측면에만 집중하면, 현재의 중국은 경제성장과 국민통합이라는 핵심 과제에 집중하기 위하여 지금은 평화적인 대외전략을 선호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최근 들어 악비와 진회의 평가가 다시 역전되고 있다는 점은, 향후 중국이 한동안은 대외 팽창적인 운동을 하기보다는 가급적 대내 수축적인 운동을 지향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내 수축적인 분위기는 중국이 내적 발전(경제성장+국민통합)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또한 중국 외부에서 어떤 강력한 충격이 가해지기 전까지는 이러한 움직임에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중국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주화론으로 표상되는 중국의 대내 수축적 운동은 기본적으로 다음 시기의 대외 팽창을 위한 준비 운동이다. 중국이 서부개발 등을 통해 경제개발에 주력하고, 역사 공정 등을 통해 국민통합에 주력하며, 북·미 핵대결 중재 등을 통해 국제적 영향력 확보에 주력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음 시기의 팽창을 위한 사전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향후 중국의 내적 발전이 어느 정도 완성되거나 혹은 외세의 강력한 충격이 가해지는 날에 송나라 때의 악비는 언제든지 부활하여 중국의 대외 투쟁을 진두지휘하게 될 것이다. 꼭 악비가 아니더라도 악비를 닮은 또 다른 영웅이 부각될 가능성도 있음은 물론이다.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인물이 영웅시되고 있는가 하는 점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끊임없는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주변국인 동시에 우방이자 라이벌인 중국과 건전한 양국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되, 중국의 대외팽창 가능성을 꾸준히 경계하고 또 견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국인 중국이 대외 수축에 들어간 기회를 활용하여 국민통합(경제민주화를 통한)과 민족통합(남북통일을 통한)이라는 내부적 과제를 하루빨리 완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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