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와 강물을 마시다

꾸벅새가 선물한 인도 여행 14

등록 2006.10.03 14:55수정 2006.10.03 15:00
0
원고료로 응원
왕소희
주인 집 할아버지는 물 한 깡통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겨울 아침. 모두들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였다. 할아버지가 물 한 깡통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물을 묻혀 이를 닦기 시작했다. 이어서 낡은 스웨터를 벗고 남은 물로 목욕을 했다. 게다가 그 물로 머리까지 감았다. 그리고 남은 물로 두꺼운 스웨터도 빨아 널었다.

과일 통조림만한 물 한 깡통으로 모든 일을 깔끔히 해 낸 것이다. 마을에서 물은 그만큼 귀한 것 이였다. 이곳에 둥지를 튼 나에게 가장 힘든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다는 것.


집주인의 며느리인 깔루 엄마는 아침 내내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나는 깔루네 집에서 목욕을 하곤 했다. 먼저 큰 솥에 물을 부어 장작불로 데웠다. 그리고 항아리에 길어다 놓은 물과 섞어 따뜻하게 목욕을 하곤 했다. 깔루 엄마는 이런 나를 볼 때마다 눈 꼬리가 올라갔다.

‘새벽부터 길어다 놓은 물을 퍼 쓰다니! 아까워 죽겠네.’

이제 물을 한 컵이라도 더 썼다간 굽고 있는 짜파티(둥그렇게 구운 밀떡)가 날라 올 것 같았다.

왕소희

"쯧쯧… 강에 가서 목욕을 하면 돼!"

학교에서 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람은 아침부터 머리를 긁고 있는 나에게 충고했다. 그래서 우리는 강으로 갔다. 강으로 가는 길은 웅장했다. 커다란 바윗돌을 넘고 작고 멋진 고목들이 흩어진 들판을 지나갔다. 열 명 남짓한 소년, 소녀들과 까까 할아버지 그리고 나였다.


옆집에 사는 까까 할아버지는 염소 두 마리를 끌고 도끼를 들고 오셨다. 강가는 가끔 위험한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라서 도끼를 준비하신 것이다. 머리에 빨래 보따리를 이고 집을 나선 우리는 한 시간 가량이 지나 베트와 강에 도착했다.

강물을 보자마자 뜨거운 볕에 지친 우리는 풍덩 풍덩 물속에 뛰어들었다. 그리곤 커다란 솔로 벅벅 문지르고 휘휘 돌려 내리치는 인도식 빨래를 시작했다.


왕소희

“흥청망청 물을 써도 돼!”

신이 나서 소리쳤다. 엄청난 양의 맑은 물들이 굽이쳐 쏟아지는 강물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나는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날아다니며 신들린 듯 빨래를 해 널어댔다. 그런데 빨래 비누는 한 개 뿐. 돌섬을 중심으로 나누어진 남탕과 여탕. 꼬마 라다가 비누를 이고 수영을
해서 양쪽에 날라 주었다.

박박박, 빨래를 하던 커다란 솔로 몸을 문지르며 목욕도 했다. 인도에선 모든 게 거칠어지기 때문에 그 솔을 써야만 목욕이 됐다. 비누칠을 하고 물살이 센 곳에 누워 있으면 저절로 헹궈졌다.

일대 소동이 가라앉을 무렵 제일 큰 아이인 가네쉬가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목욕으로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우리들은 모닥불 옆에 모여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점심을 무척이나 기대했다.

'소풍 도시락이니까 뭔가 좀 맛있는 게 있을 거야!'

그때 매일 아침, 저녁을 순리 바이삽네 집에서 먹고 있었다.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앉으면 짜파티와 사브지(야채 커리)가 날라져 왔다. 난 인도 사람들처럼 세 개의 손가락을 이용해 커리를 비비고 모아서 입으로 쏙 밀어 넣었다.

순리 바이삽은 특별히 계란, 돼지고기, 가지 커리를 해주시기도 하고 망고 짱아치를 내주기도 했다. 코리앤더(독특한 향이 나는 풀)와 무를 버무린 인도식 샐러드나 고르(꿀과 설탕을 섞어 만든 단단한 덩어리)를 으깨 우유에 섞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 어떤 인도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다. 모두들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까까 할아버지는 짜파티에 커리를 듬뿍 찍어 억지로 입에 넣어줬다.

“메이, 짜파티 열장은 먹어야 건강해지지. 몇 장 먹었어? 더 먹어. 좀 더.”

한 두 번이라면 몰라도 인도 음식을 매일 먹는 건 힘들었다. 그렇게 음식에 지쳐있던 나는 소풍 도시락을 기대했던 것이다. 가네쉬가 소풍 도시락을 꺼냈다. 두근두근. 먼저 큰 보자기를 풀었다. 짜파티가 나왔다. 그 중 두어 개의 짜파티는 접혀져 있었다. 접혀진 짜파티를 펼치자 커리가 발라져 있었다. 그것이 전부. 이번엔 작은 보자기. 여기선 동그란 것들이 데구르르 굴러 나왔다. 스윗(인도식 단과자)이었다.

'윽…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윗!'

나는 할 수 없이 눈을 꾹 감고 짜파티를 뜯어 먹었다.

왕소희

오후에 햇볕이 쨍쨍해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너무 목이 말랐다. 물은 한 방울도 없는데. 플라스틱 통에 넣어 파는 생수를 싸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은 주저 없이 강으로 내려가 강물을 마셨다.

‘저 물을 마셔도 될까? 깨끗할까? 사람이 죽으면 이 강에 띄워 보낸다는데… 이 물 마시고 어떻게 되는 거 아니야?’

나는 강둑에 앉아 타는 목을 움켜쥐고 강물을 바라봤다. 물속으로 물고기들이 지나갔다. 강가에서 염소들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물소 떼들은 강을 건너며 물을 들이켰다. 가끔 킹피셔(물총새)가 날아와 목을 축였다.

'나도 질 순 없지.'

첨벙 첨벙 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 손 가득 강물을 퍼 올려 마셨다. 차가운 강물이 내 목을 타고 꿀떡 꿀떡 넘어가면 내 몸은 저절로 시원해졌다. 나는 강 한가운데 서서 오래 동안 물을 마셨다. 쩍쩍 말라있던 몸속 깊은 갈증이 사라져갔다.

베트와 강물을 마셔버린 나는 푸른 베트와 강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 위로 얼굴을 내밀고 넙적한 돌 위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귀 옆으로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팔과 다리위로 흐르는 강물이 느껴졌다. 가끔 작은 물고기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작은 시골마을 어느 강가에서 나는 조용한 강물이 되어 있었다.

강물을 먹고 나서부터 나는 시골 생활에 더 잘 적응해 나갔다. 우물물을 매일 마셨고 아이들이 따주는 신맛뿐인 열매도 먹었다. 소녀들과 손을 잡고 들판에 나가 풀도 뜯어 먹었다. 아이들도 먹고 염소도 먹고 소도 늘 뜯어 먹는 풀이었다. 나는 자연으로 돌아온 온순한 동물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왕소희

덧붙이는 글 | 미디어다음 행복닷컴에 함께 연재중입니다.

덧붙이는 글 미디어다음 행복닷컴에 함께 연재중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 "우리 오빠" 후폭풍...이준석 추가 폭로, 국힘은 선택적 침묵 김건희 "우리 오빠" 후폭풍...이준석 추가 폭로, 국힘은 선택적 침묵
  2. 2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3. 3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4. 4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5. 5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