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 머나먼 별을 보거든 - 87회

그 곳

등록 2006.10.12 16:48수정 2006.10.12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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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화를 푸십시오.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가온 것 같습니다.”

마르둑이 손을 올리며 온화한 태도로 말했지만 남현수는 알 수 없는 불안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막바지에 왔다니 무슨 소리입니까?”

“싸이코메트리 증폭기를 여기서 사용하면 전에 보았던 일의 결말을 볼 수 있습니다. 7만 년 전 바로 하쉬-지구연합과 하쉬인들의 막바지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마치 관광 안내인과 같은 마르둑의 나긋나긋한 설명에 남현수는 품속에 지닌 사진을 내밀었다. 그것은 수이와 똑같이 생긴 연예인의 사진이었다.

“나와 같은 영상을 보았으니 이게 무엇인지 알겠지요? 사이코메트리 증폭기라는 건 결국 무의식에 있는 기억을 끄집어내 그럴 듯하게 얘기를 만드는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진실을 말해주세요!”

“아닙니다.”


마르둑은 무섭고 단호하게 남현수의 말을 잘랐다.

“당신의 깊은 기억 속에 옛 사람의 모습까지 담겨져 있지는 않지요. 단, 실제 있었던 일에 다른 모습을 차용한 것뿐입니다. 다만 너무 익숙한 인물이 등장하면 왜곡 현상이 나타나므로 가급적 얼굴이 익지 않은 인물들이 차용된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기억 속에 나온 하쉬인의 모습조차 진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남현수는 슬쩍 어이가 없다는 표시로 두 팔을 크게 올려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김건욱과 무와이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무표정하게 마르둑과 남현수를 바라보고 서 있을 따름이었다.

“전 이해가 안 가는군요. 좋아요. 그럼 그 사이코메트리 증폭기인지를 사용해서 이야기의 결말을 한번 들여다봅시다.”

남현수는 말을 하면서 은근슬쩍 마르둑과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남현수의 말에도 불구하고 마르둑은 남현수가 자신의 말을 충분히 납득했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아도 당장 그럴 참이었습니다. 그간 자료를 정리하면서도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지요.”

대체 석 달 동안이나 어떤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는 것인지 남현수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일단 남현수는 마르둑이 사이코메트리 증폭기를 꺼내들 때까지 그의 손길을 주시했다.

“자 시작해 볼까요?”

마르둑이 태연히 기기를 조작하려는 찰나 남현수는 잽싸게 손을 뻗어 사이코메트리 증폭기를 가로채 버렸다. 마르둑은 기기를 빼앗기고도 별 동요 없이 남현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이 기기에서 흰빛이 나를 향해 뿜어져 나오고 난 거의 정신을 잃었지요. 당신 말대로 이 기기가 쌍방향으로 적용된다면 그 흰빛이 반대로 향해도 상관없는 것이겠죠?”

남현수가 자신만만하게 사이코메트리증폭기를 드는 순간 뒤에서 검은 손길이 그의 팔을 단단히 잡아 비틀었다. 그 손길의 주인은 뒤에서 지켜보던 운전사 무와이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건욱씨!”

남현수는 김건욱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김건욱은 남현수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한 채 그의 손에서 사이코메트리증폭기를 빼앗아 마르둑에게 돌려주었다. 마르둑은 사이코메트리증폭기를 받아든 채 태연히 말했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네. 놓아주게나.”

마르둑의 명령 한마디에 남현수를 틀어잡은 무와이의 손길에서 힘이 슬쩍 풀렸고 김건욱은 정중한 태도로 뒤로 물러섰다. 남현수는 처음으로 마르둑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애초에 한국정부에서 남박사님에게 보낸 특별외교보좌관이라는 직함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남현수는 조용히 김건욱의 가자 직함을 읊조리는 마르둑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김건욱과 무와이가 뒤에서 벽처럼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의심 많은 남박사께서 저의 이상한 초대에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지요. 결국 여기까지 와서도 의심을 하는 바람에 저들이 입력된 대로 정중히 행동하지 않고 박사님의 몸에 손을 댄 점은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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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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