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희
한번은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살았던 인도 여성이 학교를 찾아왔다. 오랜 해외생활을 한 그녀는 봉사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지긋한 나이에 인도를 방문했다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지어진 이 학교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아침 조회 시간에 아이들 앞에 앉은 그녀는 갑자기 우유를 한 잔 달라고 했다. 그런 곳에 우유가 있을 리 없었다. 가난한 동네라 소도 없어서 우유는 멀리서 사와야 했다.
"난 아침마다 우유를 마시지 않으면 안 돼요"
단호한 그녀를 위해 멀리서 우유를 사다 날랐다. 한 잔의 우유. 모두가 그녀를 지켜보는 가운데 그 뽀얀 것을 들이켜던 그녀는 갑자기 람을 불렀다.
"당신은 너무 자신을 돌보지 않더군요. 남을 위해 일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건강이 먼저지요. 한 번 마시고 줘요"
거의 강제적 권유에 컵을 받아든 그는 잠시 서있었다. 그러더니 줄을 지어 서 있는 아이들에게로 돌아섰다.
"자, 아 해"
그는 아이들 사이로 돌아다니며 그들의 입에 우유를 조금씩 나눠서 부어주었다. 아이들은 너무나 오랜만에 맛보는 고소함에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인도인인 그는 무엇보다 그들의 배고픔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배가 고프면 희망을 가지기가 힘들다. 그 마을에 살았던 나에게도 배고픈 기억이 있다. 시골에서 생활한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나의 건강상태는 최악이었다. 먹을 것이라곤 밥 뿐이었는데 그것도 늦은 아침과 저녁 두 끼였다. 게다가 짜파티(구운 밀떡)에 국물뿐인 사브지(야채커리)가 전부여서 먹어도 전혀 포만감이 들지 않았다.
늘 배가 고팠다. 그때 우리는 언덕위에 음악 쇼를 위한 공원을 만들기 위해 매일 일을 하고 있었다. 머리꼭지를 모두 빨갛게 달궈 놓고 말겠다는 듯 이글대는 인도의 태양아래 나는 금세 까맣게 타버렸다. 익숙지 않은 햇볕은 우리를 너무나 지치고 힘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르차 시내에 가게 됐다. 오랜만에 시내를 찾은 나는 삶은 계란이 무척 먹고 싶었다. 계란 집으로 바삐 가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메이!"
"어? 리게이!"
리게이는 내가 예전에 묵었던 호텔에서 일하는 청년이었다.
"메이, 어떻게 된 거야? 얼굴이 왜 그래? 너무 말랐어!"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너 지금 너무 까맣고 지저분해. 네가 시골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고생하는구나."
한참을 안됐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리게이는 내 손을 잡아끌고 계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삶은 계란 20루피 어치(약 600원, 10개)를 사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그 계란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너무 감동스러웠다.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인 그도 형편이 넉넉지 않으면서 나에게 계란을 사 준 것이다. 계란은 너무 맛있었다. 단순히 삶은 계란이었지만 정말로 천 가지 맛이 났다.
"뭐 이렇게 맛있는 게 다 있어!"
나는 감탄, 또 감탄하며 계란을 먹어치웠다. 계란을 먹고 나자 힘이 나면서 세상이 노른자의 고운 색처럼 아름답게만 보였다.
이제 나는 여기서 우리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 작지만 이유를 붙일 수 있게 됐다.
"너, 남을 도와 본 적 없지?"하는 지니의 물음에 작은 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도 배고픈 걸 이해 해. 배고프면 좋은 생각이라곤 할 수없어"
나에게 남을 돕는다는 것은 아직도 불편하고 낯선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배고픔이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을 정말로 좋아해서 그들을 돕고 있는 지니와 인도인들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주고 싶어 하는 람과 이제 갓 배고픔을 이해한 나는 좋은 친구들이었다. 골랄끼또리아.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만나진 우리들. 우리는 이 작은 마을의 자립을 위해 '오르차 채러티'라는 이름으로 함께 힘을 합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