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55회

등록 2006.10.23 08:12수정 2006.10.23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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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까도 말했듯이 이유를 곧 알게 될 것 같네. 하지만 이 사건 하나로는 완전하게 그것을 파악해 낼 수는 없을 것이네."

"꼭 다른 사건이 터지길 바라는 사람 같군."


"바라지 않아도 터질 것이네."

"나는 항상 이런 자네 모습에 섬뜩해지네. 이럴 때 보면 자네에게서 한 점의 인간미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

함곡은 다시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풍철한을 바라보았다.

"쇄금도를 다시 만나봐야 하겠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게 분명하네. 그가 가진 정보만 우리가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사건을 보주가 제시한 시각 내에 해결할 수 있을 걸세."

쇄금도는 철담의 제자다. 그리고 최초로 철담의 시신을 발견한 인물. 그가 흉수가 아니라면 지난 시간 동안 한가로이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넌지시 던진 그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또 나름대로 이 사건의 윤곽을 잡은 듯한 인상도 주었다. 그렇다면 철담의 사건과 서당두의 살해사건 간 연관 고리도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은 만나보기 너무 늦었네. 어디 갈 사람도 아니지 않는가?"

이미 자시(子時) 초다. 이런 시각에 쇄금도를 불쑥 찾아가기는 어려운 일. 그렇다고 좌등을 다시 부르기도 그렇다.


"그렇기는 해도…."

마음이 조급한 탓이다. 왠지 당장에라도 만나보아야 할 것 같고, 미루는 것이 왠지 찜찜했다. 하지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풍철한을 보며 그 역시 지독한 피곤함을 느꼈다. 풍철한의 말마따나 아무리 이 사건을 조사하는 일이 중요하다 해도 지금 쇄금도를 찾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내려가려나?"

"쉬어야겠네. 잠이 올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풍철한은 의식적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인지 몰라도 선화가 머문다는 방을 힐끗 보고는 층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함곡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은 없나?"

입속에서 웅얼거리는 듯 나직했지만 풍철한이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풍철한이 아니었다. 하지만 풍철한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함곡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아니겠나?"

완전히 내려간 후에 함곡과 마찬가지로 나온 풍철한의 중얼거림 또한 결국 함곡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말을 입 밖으로 냈는지조차 풍철한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듣고자 했던 사람은 분명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36

문에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시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풍철한과 함곡 일행을 보내고 생각에 잠겨있던 경후는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킴과 동시에 빠르게 뛰쳐나갔다.

"태감 어른!"

보주의 처소에 갔던 신태감이었다. 헌데 그는 놀랍게도 핏물을 뒤집어쓴 듯 온몸에 혈흔이 낭자했다. 더구나 그의 걸음걸이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비칠거렸다. 경후는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누가 신태감 같은 고수를 저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쓰러질 것 같은 신태감을 부축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외까?"

"아무 말 말고 본관을 방으로 데려다 주게."

보기보다 부상이 심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목소리는 또렷했고 눈빛 역시 흐리지 않았다. 아마 나와 있는 시녀들과 방 안에서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동창 소속 수하들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경후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다.

"너희들은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않도록 해라."

그 말은 반드시 시녀들에게만 한 말은 아니었다. 주위의 수하들에게도 똑같이 한 경고였다. 시녀들은 무서워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었다. 경후는 아까 불렀던 홍교란 시녀에게 말했다.

"너는 따뜻한 물을 준비해 오거라."

그녀는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끄떡였다. 경후는 조심스럽게 신태감을 부축해 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천천히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상처는 예상외로 심했다. 그의 몸에는 예리한 병기로 스친 자국만 거의 열 군데는 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오른쪽 어깨와 가슴에는 무언가가 관통한 듯 피가 낭자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태감어른…!”

처음 들어올 때와는 달리 긴장이 풀어졌는지, 그의 눈동자는 많이 풀려있었다. 어쩌면 정신을 잃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주의 거처에서 나와 이쪽으로 오던 중이었지. 헌데 누군가가 본관을 공격했네. 도망가더군. 쫓아갔는데 연무장 쪽으로 달아나 버렸어. 후---우---!"

그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말을 하는 것조차도 힘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끊기지도, 더듬거리지도 않았다.

"상부호가 거처를 만든 곳 말이오?"

"그렇지. 하지만 그곳에 당도하기도 전에 두 명이 더 나타나 기습을 하더군. 헌데 그 두 명의 무공수위는 본관에 비해 절대 떨어지지 않았어. 한 놈은 기이한 창을, 한 놈은 옥음지(玉音指)를 익힌 놈이었어. 그 창은 마치 죽은 철담어른의 애병인 철담과 같이 생긴 것이었지."

"옥음지라면 과거 옥룡의…?"

"분명 옥음지였어…!"

"도대체 어떤 놈들이 그 무공까지 익히고 있단 말이외까? 다른 곳도 아닌 이 운중보 안에서…."

"복면을 해서 알아볼 수 없었네. 하지만 옥음지를 펼치던 자는 내 첩인장(疊燐掌)에 등짝을 적중 당했으니 아무리 고수라지만 하루 정도는 움직이지 못할게야."

"등에 흔적은 남아있겠구려."

첩인장은 무림에서 최고라 일컫는 십대장공(十代掌功) 중의 하나. 이것의 무서운 점은 한 번의 공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파도가 밀려들 듯 한 번의 장력발출에서 여러 번의 타격이 쉴 새 없이 몰아쳐 진다는데 있었다.

그래서 첩인장의 위력을 모르는 사람은 첫 번의 장력을 피해냈다고 해서 움직일 때 그 뒤에 파도처럼 밀려드는 음유한 잠력(潛力)에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첩인장은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음유한 기를 바탕으로 펼치는 것으로 장에 맞을 경우 장인(掌印)이 서너 개 겹쳐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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