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74회

등록 2006.11.17 08:36수정 2006.11.1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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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몸을 돌려 한 쪽 귀퉁이에 있는 궤짝을 열어 두툼한 책자 두 권을 꺼냈다. 그 궤짝은 꽤 큰 컸는데 그 속에는 꺼낸 책자와 같은 책자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이게 필요해 온 거겠지?”


좌등에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귀산노인의 시선은 함곡과 풍철한에 머물러 있었다.

“함곡선생께서 여쭈어 볼 말도 있는 것 같더이다.”

귀산노인은 무게도 꽤 나갈 것 같은 두툼한 책자를 탁자 위에 놓고는 함곡 쪽을 향해 밀었다.

“이것은 현재 운중보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간단한 내력과 특징을 적어놓은 것일세. 또 이것은 현재 운중보에 들어오고 나간 인물들에 대한 기록일세. 보주를 제외하고는 이것들을 본 사람은 몇 안 되네. 단, 책자는 이곳에서 보기는 하되 가져나갈 수는 없네. 물론 보주의 명도 있고 하니 함곡께서는 언제든지 와서 보실 수는 있네.”

겉이 낡은 책자는 인명부였다. 운중보 내에 있는 인물이라면 모두 실려 있을 터였다. 그리고 또 한권은 새로 묶은 듯 했는데 아마 운중보에 들락거리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인 것 같았다. 궤짝에 들어있는 비슷한 책자들은 해마다 운중보가 생긴 이래 드나든 사람들의 기록일 것이다. 그것은 운중보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좌등이 운중보 내에 있는 모든 인물들의 신상기록을 요구한 함곡과 풍철한의 부탁에 대해 들어줄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었다. 일일이 조사해 다시 이름을 기록해 넘기려면 최소 이틀은 걸릴 터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곡은 대답과 함께 일단 인명부로 보이는 책자를 넘겼다. 풍철한이 곁에 바싹 다가들어 책자에 시선을 던졌다. 보주서부터 시비에 이르기까지 이름부터, 꼼꼼하게 출생 내력과 나이 등을 기재해 놓았다. 간단하기는 하지만 맡은 직책이나 운중보에서 하는 일까지 분류해 기재해 놓은 덕택으로 한 눈에 운중보의 인물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모두 이백이십칠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 권은 아마 올해 초부터 기록한 것 같았다. 이십여 장까지 올해 초 운중보에 드나들었던 인물들의 기록을 기재해 놓았다. 매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드나드는 사람의 변동이 있을 때마다 기재해 놓은 것 같았다. 내용은 매우 꼼꼼해서 이 책자 하나면 언제든 인원수의 변동까지 확연하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

향이 두 자루 정도 탈 시간이 지났을까? 실내에 있는 사람들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어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귀산노인은 뭐가 그리 바쁜지 한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물을 끓여 연신 다시 찻물을 우리고, 정갈해 보이는 실내를 애꿎게 정리하는 듯 보였다.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찾아오자 마음이 불안해진 탓일까? 귀산노인의 눈빛도 불안정해 보였다. 불안정한 눈빛은 설중행으로부터 기인된 것 같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듯 보였지만 귀산노인의 눈길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며 흘끔흘끔 설중행을 살피고 있었다.

‘알아보았군. 하기야 귀산노인의 눈을 피하는 것보다 귀신을 속이는 게 쉽다는 말이 있었지.’

설중행은 답답한 듯 창밖을 보기도 하고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귀산노인의 눈길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저 궤짝 책자 중 어디쯤인가 자신이 들어온 날짜와 이곳을 쫓겨나간 날짜에 자신의 이름도 기재되어 있을 것이다. 들어온 이유와 쫓겨나간 이유에는 뭐라고 기재되어 있을까? 은근히 호기심이 일었다.

- 차라리 잘된 일 일게야.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모두 알 필요는 없지. 모르는 게 편해. 하여튼 다시 이곳에 돌아올 생각은 버려라. 네 놈이 돌아오면 모두가 불행해져. 아니 네 놈이 자의든 타의든 이곳에 돌아온다면 이미 불행해져 있을 게야. -

아마 설중행이 운중보에서 쫓겨나가기 며칠 전이었을 것이다. 가끔 먹을 것을 찾거나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 귀산노인의 거처를 드나들었던 그에게 처연한 눈길로 해 준 마지막 말이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당시 어린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고, 지금 역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의든 타의든 여하튼 운중보로 돌아왔다. 귀산노인의 말대로라면 모두가 불행해질 터였다. 아니 이미 여러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불행은 시작된 것일지 몰랐다.

“정말 부지런하시군요.”

함곡이 책자의 중간쯤에서 기록이 멈춰져 있는 곳을 보다가 풍철한과 눈을 마주치고는 천으로 넘쳐흐른 탁자 위의 찻물을 닦아내고 있는 귀산노인에게 한 말이었다. 풍철한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책장 뒤로는 백지였다.

“나이가 들수록 몸을 움직여야 한다네. 편한 것을 찾으면 자꾸 몸이 굳어지게 되지.”

함곡이 한 말뜻을 몰라서 엉뚱한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풍철한의 눈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은 기색이 미세하나마 흐르고 있었다.

언제 기재한 것일까? 날짜와 시간을 기재한 그곳에는 아주 분명하게 신태감과 윤석진 그리고 진가려란 여인이 죽었음을 기록하고 현재 인원이 모두 오백십이 명이라 써 놓았다. 자신들 일행은 분명 신태감과 윤석진을 조사한 직후에 이곳을 방문했다. 귀산노인은 언제 그러한 사실들을 알았고, 벌써 기재해 놓은 것일까? 여유 있게 아침까지 들고 있었으니 어쩌면 자신들보다 먼저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운중보 내에서 일어난 일은 귀산어른의 눈을 피할 수 없다더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함곡의 말에 귀산노인은 이제 정리가 모두 끝났다는 듯 들고 있던 천조각을 한쪽 구석으로 던져놓고는 의자에 앉았다. 찻잔을 잡는 노인의 손에는 죽음의 꽃이라는 검버섯이 피어있고 깡말라있었다.

“대단하긴…. 하루에 두 번씩 반드시 곽정흠과 엽락명(葉樂明)이 이곳을 들른다네. 새벽에 이미 곽정흠이 다녀갔네.”

곽정흠과 엽락명은 교대로 운중보 경비를 맡고 있는 책임자다. 그들은 각각 의례적으로 하루에 한 번 귀산노인에게 인원의 변동에 대해 보고를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는 의미다.

“누구라 생각하시오?”

지금껏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에 불만을 가졌던 것일까? 풍철한이 퉁명스럽게 귀산노인에게 말을 던졌다. 귀산노인은 눈매가 가늘어지며 풍철한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풍철한을 살피는 듯한, 하지만 아직까지는 약간 무시하는 모습이었다.

“뭐가 말인가?”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이 노인네들의 버릇인줄은 알지만 나는 아직 아침도 먹지 못했소.”

풍철한 역시 귀산노인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그저 묻는 말이나 대답할 것이지 말장난 할 시간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귀산노인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제법 사람을 충동질칠 줄도 아는군. 재미있어…. 보주가 왜 자네를 지목했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군.”

“철담어른을 죽인 흉수는 누구요?”

기습적이고, 단도직입적이었다. 허나 귀산노인과 같은 노회한 인물이 풍철한의 술수에 말려들 리가 없었다.

“어제도 두 녀석이 와서 미친 소리를 해대더니만 똑같은 놈이 또 있었군.”

“노인장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소.”

풍철한은 고의로 손에 용비를 들고는 만지작거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다. 귀산노인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무섭구만. 보주의 위세로 어찌해 보겠다는 건가? 미련한 녀석.”

대뜸 욕설과 함께 귀산노인이 말을 이으려 하자 함곡이 끼어들었다.

“어제 왔다는 두 사람이 백도와 쇄금도였습니까?”

“역시 함곡이로구먼.”

예상했던 바였다. 오히려 그 두 사람이 더 일찍 찾아오지 않고 하필이면 왜 어제 귀산노인을 찾아온 것일까? 함곡은 자신들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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