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76회

등록 2006.11.21 08:28수정 2006.11.2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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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자신이 알고는 있지만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듣는 이들을 더욱 궁금하게 만드는 일이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답할 수 없다는 말에서 벌써 해답은 나오고 있었다. 분명 이 운중보 안에 구룡의 무공을 익힌 인물이 있으리라는 것.

“이미 여기에 기록해 놓으셨으니 만큼 신태감께서 구룡 중 화룡(火龍)의 염화신공(炎火神功)과 옥룡의 옥음지에 살해당한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또한 어제 살해된 서당두란 인물 역시 독룡의 독룡조에 당한 것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들었네. 그렇다 해도 노부는 자네에게 해 줄 말이 없네.”

워낙 단호한 태도였다. 분명 뭔가 있었다. 알고는 싶었지만 이 정도 수확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어느 한 부분을 단단하게 잠그고 있다면 다른 쪽에서 찔러 들어가야 했다.

“어제 쇄금도의 태도에서 이상한 기미를 느끼신 게 없었습니까?”

“뭔가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네. 더구나 백도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한 그리 쉽게 당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네.”

귀산노인의 말투는 백도에 대해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노인장은 쇄금도가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계셨던 거구려.”

풍철한이 기습적으로 귀산노인의 말꼬리를 잡으며 파고들었다. 귀산노인이 눈길을 돌려 풍철한을 보았다. 역시 보기보다 만만치 않은 녀석이었다.


“철담의 제자이자 최초로 철담의 죽음을 발견한 아이였네. 흉수로서는 가장 껄끄러운 존재가 아니었겠나?”

교묘하게 찔러 온 풍철한의 질문을 유연하게 비껴나가고 있었다. 흉수가 쇄금도를 노릴 이유는 물론 귀산노인이 대답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귀산노인이 중요한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노부는 쇄금도에게 몸조심하라고 당부했네. 그 말은 지금 똑같이 자네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네.”

그 말을 들은 일행 모두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서늘한 느낌에 긴장된 빛을 띠었다. 반드시 어제 귀산노인이 경고한 인물 중 하나인 쇄금도가 살해되어서만은 아니었다. 중원 무림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운중보에 이미 오래 전부터 음습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느낌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풍철한은 답답한 마음에 궁금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이 운중보 안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분명 노인장이나 좌등 선배나 이미 이런 일들이 터질 것이라 예상들 하고 있었다는 모습 아니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어떤 연유로 이런 일이 터지고 있느냐는 말이오.”

겉돌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사건의 핵심을 파고들지 못하고 겉만 빙빙 돌고 있었다. 더구나 안으로 파고들려 해도 오히려 운중보 내부 인물들이 장막을 치고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허나 귀산노인은 이미 이 대화를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네들의 일이 아닌가? 정작 그 일을 맡은 사람은 자네들이지 노부가 아니란 말이네.”

“뭔가 사정을 가르쳐 주어야 방향이라도 잡을 것 아니오? 하나같이 자꾸 감추려만 하니 우리보고 어떡하란 말이오?”

“노부는 감춘 게 없네. 다만 노부가 대답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사안은 대답하지 않는 것 뿐이네. 어설픈 대답은 자네들이 흉수를 색출해 내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아 대답하지 않을 뿐이지. 불확실한 정보는 오해를 가져오고 그 오해는 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네.”

“빌어먹을….”

풍철한이 뭐라고 하려하자 함곡에 그의 팔목을 잡았다. 이미 귀산노인은 할 말 다했다는 듯 대화의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이런 때에는 아무리 두들겨도 열리지 않는다. 물러날 때였다. 그는 앞에 펼쳐진 책자를 덮었다.

“현재 이 운중보 안에 있는 인원은 여기에 기재된 숫자가 정확하겠지요?”

함곡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책자 두 권을 귀산노인에게 건넸다. 귀산노인은 그 책자들을 받아들자마자 곧바로 몸을 일으켜 궤짝 쪽으로 걸어갔다.

탁---!

책자 두 권을 궤짝 안으로 넣고 궤짝 뚜껑을 닫고 나자 귀산노인은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이들이 인명부를 가져가지나 않나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만큼 인명부가 귀산노인에게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모르지. 노부도 파악하지 못한 귀신이 몇 명 더 있을지….”

흘리듯 던지는 말은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서 숫자가 틀렸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귀산노인이 겉 치례로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속이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반을 들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2

조반은 좁쌀이나 귀리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죽과 새우를 넣어 만든 교자였다. 노리끼리한 색깔을 띤 죽은 수저를 들 필요도 없이 그저 마시면 되었다.

“백부님의 사인(死因)이 사부님의 심인검(心印劍)과 구룡 중 혈룡의 혈룡장(血龍掌)이라니 정녕 혼란스런 일이군요.”

옥기룡(玉奇龍)은 정말 혼란스러웠다. 동정오우 중 혈간(血竿) 옥청천(玉淸天)을 감히 누가 시해할 수 있을까? 더구나 철기문의 세 장로가 모시고 오는 길이었는데 변을 당했다니…. 게다가 백부의 사인이 심인검과 혈룡장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기야 심인검과 혈룡장이 아니라면 백부님을 시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심인검과 혈룡장이라도 백부님을 시해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헌데 흉수가 누구기에 사부의 심인검을 익히고 있단 말인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구룡의 혈룡장이 나타난 것도 충분히 놀랄만한 일인데 사부의 심인검이라니…?

물론 철담어른의 사인도 심인검이었다. 허나 그것은 이 운중보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고, 자신을 비롯한 사형제들도 모두 전수를 받았을 터이니 성취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사형제들 모두 익혔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도 모르게 사부가 가까운 측근 누군가에게 전수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운중보 외부인 중에 심인검을 익힌 자가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단각주(亶閣主)가 직접 조사해 보고해 온 내용이니 틀림없을 게다.”

신기수사(神機秀士) 옥청량(玉淸亮)이었다. 옥기룡의 숙부이자 혈간의 세 형제 중 막내.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젊어서 관에 몸담은 적이 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나이답지 않게 맑고 투명해 보이는 눈에 깊은 지혜가 담겨있는 듯 했다.

“단각주까지 직접 움직였음에도 이런 일이 미연에 방지되지 않았단 말씀입니까?”

따지듯 묻기는 하지만 사실 어느 누가 감히 혈간 옥청천을 시해하려 들 것이라 예상했던가? 더구나 살해된 곳이 건덕(建德)이라면 철기문의 영향 아래 있는 곳이다. 백부님 역시 번잡함을 싫어하는 분이라 식솔들이 따르는 것을 극구 말렸을 터였다.

“단각주는 네 부친의 명으로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사고가 난 뒤에 현장으로 간 모양이다.”

“단각주라면 흉수에 대한 것은 이미 알아냈겠지요?”

“아직…. 하지만 곧 알아낼 수 있을게다. 형님을 기습한 자들은 모두 이십여 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수뇌로 보이는 두 놈이 구천각의 추격을 뿌리치고 사라진 것 같다.”

“그 두 놈이 심인검과 혈룡장을 익힌 놈들이겠군요. 아무리 구천각이라도 그런 놈들이라면 어려웠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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