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89회

등록 2006.12.08 08:08수정 2006.12.08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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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에 매달린 여러 가지 모양의 도구를 꺼내든 그는 침(針)과 같이 생긴 것을 골라 들고는 이곳저곳을 문질러보고 있었다.

"역시 그랬군."


조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중의는 이미 상황을 전해 들었던 터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전문가답게 망설임 없이 조사했고 마지막으로 철담의 서탁에 놓인 찻잔을 조사하다가 중얼거렸다.

@BRI@"뭔가 찾아냈는가?"

운중보주의 물음에 중의는 시선을 돌려 대답 대신 물었다.

"이 친구와 함께 자네도 차를 마신 겐가?"

"물론이네."


"몸에 아무런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나?"

"전혀 없었네."


중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옆에 있던 성곤 담자기가 물었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겐가?"

중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탁에 놓여있는 잔과 차 담자를 세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군. 흉수는 철담 만을 노렸어. 그렇지 않았다면 철담의 잔에만 묻혀 놓았을 없지."

무언가 철담의 잔에 들어 있었던 것일까? 운중보주가 재차 물었다.

"무슨 말인가?"

"나나 자네들 모두 철담 이 친구가 아무리 방심했다 해도 이렇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 보이는 상황 그대로 운중 자네가 손을 썼더라도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네."

동정오우간 아무리 차이가 있다 해도 목숨을 걸고 승부를 하면 정작 누가 승리할지 모르는 일이다. 미세한 차이는 그날의 몸 상태나 정신적인 안정감에 따라 달라지기 쉽다. 여하튼 그럴 리야 없겠지만 동정오우간 승부를 본다면 무공이 제일 약한 중의를 제외하고 적어도 천 초 이상은 겨루어야 그 결말이 날 터였다.

지금 현 상황만 본다면 운중보주가 손을 쓴 것이고, 그렇다 하더라도 이리 쉽게 철담이 당했을 리 없다는 말이었고, 오히려 그 말에는 운중보주가 자네가 손을 썼을 리 없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너무 지난 관계로 틀림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철담의 찻물에 백일취(百日醉)로 보이는 산공분(散功粉)이 들어 있었던 것 같네. 찻잔에 말라붙은 미세한 흔적이 그런 종류인 것 같으이…. 헌데 자네의 잔이나 담자에는 그런 자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네. 그렇다면 결국 찻물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찻잔에 이미 묻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일세."

중의가 두 개의 찻잔을 유심히 살피고 무언가 긁어내던 행동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던 모양이었다. 백일취는 일종의 마취제다. 산공독이 이름 그대로 공력을 흩어지게 해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마취 성분이 있다는 점에서는 백일취와 다를 바 없지만, 산공독에는 독성이 있어 후유증을 가져오게 한다.

그 반면에 백일취는 투입되는 양에 따라 마취되는 시간의 조절이 가능하고 후유증이 없어 중의와 같은 의원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번에 알아볼 수밖에….

"거 참…, 기가 막힐 노릇이군. 철담은 다른 것은 몰라도 다기(茶器)만큼은 손수 관리했던 친구가 아닌가? 찻물이나 찻잎에 묻힌 것이 아니라 잔에 묻혔다면 철담 자신이 아니고야 할 사람이 있었느냐는 말이네."

성곤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개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기를 끔찍이 아낀다. 또 사용한 다기는 찻잔을 비롯해 물로 깨끗하게 닦아내는 경우가 별로 없다. 대개는 물로는 그저 찌꺼기를 헹구어 내는 정도고 오히려 마른 천으로 정성스레 닦아내는 것이다.

특히 도자기로 만든 다기라면 더욱 그러하여 그러다 보면 다기에 오랫동안 조금씩 다향이 배어들게 되고 오래되어 색깔이 변한 것일수록 더욱 소중한 다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기의 겉이야 깨끗하다 할지라도 다기의 안을 보면 찻물이 오랫동안 스며들어 다기 본래의 색과 어우러지며 은은히 누런색을 띠게 되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차를 즐기는 철담은 다기 역시 아끼고 있었던 관계로 결국 철담 자신이 묻혀 놓았거나 아니면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가 묻혀 놓았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묻혀 놓았다 하더라도 철담을 노렸다면 잔 모두에 묻혀 놓았어야 했지 않을까? 유독 그 잔에 묻혀 놓았다면 어떻게 철담이 그 잔을 사용할 것인지 알 수 있었을까?

"……!"

성곤의 지적에 중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다시 철담의 시신에 다가가 양손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찻잔 안에만 발라놓은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 모르지만 손에는 묻은 흔적이 없군."

중의는 매우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살펴 본 상황에 대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한 흉수라 하더라도 뭔가 단서는 남아있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펼쳐진 상황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백해 도대체 다른 단서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구룡의 무공이 나타나기 시작했네. 어제 도착한 동창의 당두 한 명이 독룡아의 흔적이 남은 채 죽었고, 신태감이 화룡(火龍)의 염화신공(炎火神功)과 옥룡의 옥음지(玉音指)에 의해 살해되었네."

"신태감이…?"

운중보주의 말에 중의가 경악성을 터트렸다. 아마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럴 수가…? 그렇다면 어제 들어온 동창의 수뇌 두 명이 들어온 날 살해되었다는 말인가? 이거 큰일이군."

중의는 무엇이 걱정인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중의는 신태감이나 동창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일까? 단순히 운중보를 걱정해서 그런 기색을 보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 역시 당황스럽네. 구룡의 비급을 분실하는 순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했지만 이제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네."

운중보주가 탄식하듯 말을 뱉자 돌연 중의는 기묘한 표정으로 운중보주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지금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인가?"

운중보주가 영문을 알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잠시 운중보주의 표정을 살피듯 바라보던 중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자신이 말을 해놓고 실수했다는 표정이 분명했다.

"아니네…. 구룡의 무공이 아무나 그리 쉽게 익힐 무공이 아니라는 뜻이네."

뭔가 말을 돌리는 모습이었지만 운중보주나 성곤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성곤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네만 혈간의 시신에도 구룡 중 혈룡의 혈룡장(血龍掌)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네. 혈간을 죽일 정도라면 이미 극성에 달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나?"

중의는 여전히 뭔가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노회한 그는 더는 두 친구들에게 의혹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철담의 반지는 누가 빼간 것 같군. 철담이 죽은 후에 말이야."

혹시 자네들이 빼간 것이 아니냐는 느낌을 가진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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