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90회

등록 2006.12.11 08:11수정 2006.12.11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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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의심을 하거나 추궁하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의 유품이니 수습할 수도 있는 일이었고, 단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철담의 반지는 어제 사라졌네. 내 생각으로는 신태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네."


운중보주의 말이었다. 친구의 반지가 사라졌음에도 특별한 일도 아니라는 말투였다. 허나 정확하게 누군가를 지목했다는 것은 그 반지에 꽤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의미도 되었다. 그 말을 들은 성곤이나 중의는 그저 고개만 끄떡였다. 중요한 일이었지만 의도적으로 반지 건에 대해 더는 언급하려 하지 않는 것이 그들이 간섭할 일은 아니라는 태도였다. 오히려 신태감이 빼간 것이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BRI@세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반지 문제에 대해서는 더 거론하지 않았다. 중의는 숙였던 몸을 일으키면서 손을 털었다.

"흉수를 잡아내기 무척이나 어렵겠군."

"잡아내지 않아도 제 발로 모습을 나타낼 걸세. 더구나 어차피 철담과 혈간, 그리고 신태감까지 살해한 이상 흉수나 그 목적은 분명해지지 않았나?"

성곤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하자 중의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자넨 지금 흉수가 동림당(東林黨)의 잔당이라고 보고 있는 겐가? 아직 그들에게 그럴만한 힘이 남아 있단 말인가?"

"뚜렷한 증거는 없네. 하지만 분명 동림당이든 아니든 동림당과 관련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네. 구룡은 알게 모르게 동림당을 도왔네. 아니 구룡은 동림당의 보호막이었네. 그러니 지금 구룡의 무공이 나타나는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나?"


성곤의 지적에 중의는 고개를 끄떡였다.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일까? 고개를 끄떡이고는 있지만 중의의 얼굴에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자네 역시 같은 생각인가?"

중의는 운중보주를 보며 물었다. 물었다고 하기보다 뭔가 확인을 하려는 말투였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약간 다르네. 그건 차차 상의해 보도록 하지."

"우선 혈간을 보러 가야겠군. 이곳보다는 오히려 그쪽이 얻어낼 게 많을 것 같네."

중의 역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운중보주와 성곤을 재촉했다. 이곳은 싸운 흔적도 남긴 것이 없고, 흉수가 운중보주라는 너무나 명백한 상황 이외에는 찾아낼 단서가 없지만 혈간은 드잡이질이 있었다는 점에서 뭔가 흉수의 정체나 의도를 알아낼 것이 많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지."

성곤이 시원스럽게 대답을 하며 앞서 나갔다. 철담의 거처를 나서는 세 친구의 표정은 똑같은 것 같았지만 그들이 느끼고 있는 의혹은 서로 달랐다.


48

이미 점심식사는 끝나가고 있었다. 둥그런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은 너무나도 푸짐하고 맛있는 것들이었다. 산해진미(山海珍味)란 말은 아마 이 경우를 위해 준비된 말인 것 같았다. 허나 아침을 거른 상태라 배고프기도 하련만 식욕이 나지 않는 듯 한결같이 수저를 들었다 놓았다 할 뿐이었다.

배부른 미식가들이나 하는 그런 모습은 풍철한과 같은 인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그였지만 이곳에 들어선 순간 허기는 어디에 갔는지 식욕이 저만큼 달아나 버렸다.

유일하게 음식을 꾸준히 먹고 있는 인물은 능효봉 하나였다. 그는 아주 천천히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주위의 무거운 분위기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다른 사람들의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표독스러운 가운데 경멸스러운 기색이 어린 눈빛으로 상교교가 빤히 쳐다보아도 능효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아마 형제 중 막내인 혈녹접 소유향이 운중선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모습을 보며 냉랭하게 코웃음 치던 선화의 표정을 보고 나서였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풍철한은 그렇다 해도 다른 이들마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 점심식사를 초대한 주인에 대한 예의는 아닌 듯싶었다.

"풍대협과 함곡선생은 정말 인내심이 깊은 분들이구려."

그럼에도 상만천은 개의치 않았다. 본래부터 소식(小食)을 하는 그는 오히려 꾸역꾸역 배 터지도록 먹는 자들을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처음부터 이 자리는 그 자신도 분위기를 바꾸기 어려운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침의 일로 인해 초대받은 손님들은 자신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신경을 쓸 터였고, 아침부터 부어터진 큰 딸년은 여전히 표독스런 눈으로 능효봉이란 자와 처음부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믿고 있는 작은 딸은 은근한 눈빛으로 설중행이란 놈과 눈을 맞추려 하고, 무엇보다 혈녹접과 선화의 서먹한 긴장감은 주인인 자신에게까지 음식이 목에 넘어가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버릇처럼 입가에 묻은 기름기를 찍어내며 함곡이 물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신들 일행을 부른 이유가 나올 터였다. 그러자면 적당히 장단을 맞추며 상대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오?"

상만천은 눈짓으로 식탁에 놓인 의자 중 유일하게 빈 한 자리를 가리켰다. 이미 비어 있는 한 자리는 용추의 자리쯤이라고 일행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다른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지만 곧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허나 이미 반 시진 이상 흘렀음에도 용추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기는 했다.

"상대인의 마음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더구나 사람을 그냥 놀리는 법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주는 만큼 일을 시킨다고 말들 하더군요. 하지만 이곳에 들어와서까지 점심을 거를 정도로 용추께서 바쁘신지 몰랐습니다."

은근히 상대에게 주도권을 넘기겠다는 의도. 호랑이굴이라고 생각할만한 이곳에서 함곡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상대가 의도하는 데로 따라가 주어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응할 방도를 찾는 것이 현명했다.

"바쁜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심각하오. 어제 사고를 당했소."

그 말에 좌중은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사고라니…?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용추에게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사고라니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제 저녁에도 멀쩡했던 사람이 아닌가?

허나 함곡과 풍철한은 용추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보다는 그러한 사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상만천에 대해 더 놀라고 있었다. 사실 상만천은 매우 비밀스런 사람이어서 내부의 일을 밖으로 절대 알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측근 중 가장 가깝다고 할 용추의 사고 소식을 이리 쉽게 말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근심 어린 표정으로 되묻는 함곡을 상만천은 기묘한 눈빛으로 유심히 살피는 듯했다.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내심을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을 쭉 훑어보다가 잠시 탄식을 불어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여러분들께 용추선생의 사고소식을 말한 것이오. 기분 나쁘실지 모르지만 양해하시기 바라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뜸을 들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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