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바람이 스산하다. 푸르던 초목들이 낙엽을 떨어뜨리고 겨울 준비를 마쳤다. 1388년 10월. 개경을 떠난 하정사 일행이 의주관(義州館)에서 하룻밤을 묵고 압록강을 건너는 날이다. 구룡정 아래 나루터 뱃전에 철석이는 물소리가 을씨년스럽다. 일꾼과 마부들이 짐 보따리와 마필을 거룻배에 싣느라고 조용하던 뱃전이 소란스럽다.
이윽고 구룡정을 나선 사신일행이 나루터에 도착했다. 짐 보따리와 식량과 마필을 실은 거룻배를 먼저 떠나보내고 정사(正使) 이색이 나룻배에 올랐다. 정사가 탄 배에는 황제에게 바칠 표문(表文)이외에는 아무도 태우지 않았다. 환송 나온 의주목사가 공손히 절을 하며 예를 올렸다. 문하시중에게 예를 올리는 것인지 표문에 예를 올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BRI@두 번째 나룻배가 부사(副使) 이숭인과 역관(譯官) 그리고 마부들을 태우고 떠난 다음 서장관(書狀官)과 하인들을 태운 배가 출발했다. 이방원이 나룻배에 오르자 사공이 삿대를 강 언덕에 질렀다. 둔중한 몸채가 움찔하더니만 스르르 움직이며 강물을 타고 흐른다. 압록강이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맑고 깨끗한 물빛이 가히 일품이다.
압록강은 물빛이 오리의 머리 색깔을 닮았다 하여 압록(鴨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중국에서는 청하(淸河)라 불리며 장강, 황하와 함께 3대강으로 통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해바다로 흘러내리는 압록강 수로는 명나라와 공동으로 이용하지만 영유권은 고려가 행사하는 고려의 영역이다.
두 번 다시 건널 수 없는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아닌가?
바람과 함께 조국 고려 땅이 점점 멀어진다. 뱃전에 기대 선 방원은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의주 삼각산을 바라보며 깊은 시름에 잠겼다. 인질이나 다름없는 사행길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다시는 건너올 수 없는 압록강을 건너고 있을 수도 있다.’ 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왔다. 두려움보다도 약소국의 아들로 태어난 안타까움이 가슴을 치밀고 올라왔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노여움을 사 투옥되거나 처형될 수도 있다. 고려왕을 쫓아낸 장군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다른 사신은 돌아온다 하드래도 자신은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길이 될 수 도 있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보겠습니다.” 라고 아버지 이성계에게 다짐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 잡아 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조국산천이 망막에 맺혀왔다.
“좋은 기회로 활용하겠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고려인에게 명나라는 세계의 전부였다. 천자가 있고 황제가 있는 나라. 세계 문화의 중심지이자 문명이 꽃피는 곳 명나라. 모든 젊은이에게는 동경의 세계였고 환상의 세상이었다. 사실 이방원은 고려 이외의 다른 나라를 다녀온 일이 없었다. 처음으로 나라밖을 나가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순풍에 돛을 단 배가 강심을 통과하자 위화도가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왔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위화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방원은 만감이 교차했다. “5월7일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위화도에 도착한 아버지가 5월22일 회군을 결행하기까지 15일간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하셨을까?” 라고 생각하니 형언키 어려운 태산 같은 것이 밀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은 그 번민 속에서 15일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빨리 결단을 내려야지 15일간을 끌어간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항상 어머니 한씨로부터 “참을성을 길러라”라고 꾸지람을 받았지만 고칠 수 없는 천성이라 여겨졌다. 이것이 자신의 단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고뇌하던 위화도를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인내력이 존경스러워 보였다. 비 내리는 수중 섬에 갇혀 진퇴양난의 15일간을 버틴다는 현실이 자신에게 닥친다면 감내하기 어려운 끔직한 일이었다. 자신에게 그러한 결단의 시간이 다가온다면 자신은 그렇게 해낼 자신이 없었다. 장군을 떠난 자연인 아버지 이성계에게서 닮고 싶은 것이 있다면 참을성이었다.
명나라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감회가 새로웠다
어느덧 배가 명나라 쪽 강안(江岸)에 닿았다. 뒤돌아보니 구룡산은 아스라이 구름 속에 묻혀있고 철산의 산봉우리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나룻배에서 내렸다. 난생처음 밟아보는 명나라 땅이다. 심호흡을 했다. 폐 속을 드나드는 공기는 고려나 명나라나 똑같았다. 명나라 땅을 밟는 순간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가 스치며 등줄기에 전율이 흘렀다.
“지금은 명나라 땅이지만 우리의 조상들이 호령하던 땅이지 않은가?”
대륙을 호령하던 선조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안시성 영웅들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요동 벌판을 휘몰아치던 고구려인들의 말굽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벅찬 감동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자신이 인질이나 다름없이 끌려가는 신세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21살 청년은 가슴이 뛰었다.
“여기가 명나라 땅이란 말인가?”
명나라 땅에 있는 모레는 고려 땅에 있는 모레보다 더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국(大國)이니까. 허나, 자세히 살펴보니 고려의 모레와 다를 바 없었다. 주변에 산을 휘둘러보았다. 둥그런 모습이 고려의 산보다 더 못생겨 보였다. 산야의 풀과 나무도 그랬다. 명나라에 있는 것은 모두가 엄청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산천은 다를 바 없는데 고려를 옥죄는 명나라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만 아플 뿐이다. 사신일행은 대열을 정비했다. 우선 옷을 갈아입었다. 명나라 땅에 들어왔으니 소매의 폭이 좁은 옷으로 갈아 입어야했다. 맨 앞에 깃발을 펄럭이는 전배(前排)를 앞세우고 정사 이색이 탄 말을 견마잡이가 이끌었다. 그 뒤로 부사, 서장관, 역관 등이 탄 말이 뒤따랐다. 말 안장에는 수십 켤레의 짚신이 대롱거렸다.
뒤쪽으로는 식량자루를 등에 메달은 말과 이불 보따리를 잔등에 실은 말이 뒤따랐다. 사신 길이라 하면 영광의 길이요 호강의 길이라 생각하지만 식사를 직접 해결해야 하고 대부분 노숙이다. 때문에 이불 보따리를 가지고 떠난 것이다. 집 떠나면 고생보다도 고국 떠나면 더한 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오를 갖춘 일행은 주렌청(九連城)을 향하여 출발했다.
애자하(愛刺河)를 건너 얼마쯤 지났을까. 서산에 해가 뉘엿뉘엿 땅거미가 짙어온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노숙할 숙영지를 찾아야 한다. 30여명이 밥을 지어먹고 잠을 자야 하니까 물이 가까이 있어야 한다. 마땅한 자리를 찾아 낸 하인들이 짐 보따리를 풀고 장막을 친다. 찬바람을 막아 숙소로 쓰기 위함이다.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간 하인들이 마른 나무를 한아름 찍어와 모닥불을 피웠다. 한번 지핀 모닥불은 일행이 떠날 때까지 꺼트려서는 안 된다. 불빛을 밝히고 맹수들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가마솥을 걸고 밥 짓기에 분주하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노독에 빠져 깊은 잠에 떨어졌다.
노숙자가 된 영의정
요동성에 들어가는 날까지 15일간은 이렇게 노숙하는 것이 사신들의 일상이다. 고국에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떠받들어 주는 문하시중도 사신 길에 나서면 하늘을 지붕 삼아 노숙을 했다. 고난의 길이다.
요동 땅을 베게삼아 자리에 누었던 이방원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서는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총총한 별빛은 난생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별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나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 죽는다면 하늘의 부름으로 받아드릴 것이며 살아 돌아온다면 많은 것을 보고 돌아오리라.”
장막을 쳐놓은 간이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해 보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노숙 체질이 아닌 것만 같았다. 누가 따뜻한 아랫목을 싫어하랴 만은 유난히 자신은 그런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묘한 인연이었다. 포천 피난길에서도 서모 강씨와 노숙을 했는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정적 이색과 노숙을 했다. 공교롭게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밤을 같이 보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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