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은 넓고 반도는 좁더라

[태종 이방원27] 선조들의 고토를 밟으며

등록 2007.01.12 18:49수정 2007.01.1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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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련성을 떠난 사신일행이 금석산을 지나 봉항산을 지날 무렵, 누군가가 귀띔해주었다. "봉황산 자락에 고구려의 옛 도읍지 국내성이 있었다"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방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밋밋한 산과 들뿐, 고구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삼가하(河)와 유가하(河)를 건너니 높고 깊은 산이 앞을 가로 막았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평평하고 밋밋한 산의 모습하고는 생김새부터 달랐다. 깎아지른 모습이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분수령을 넘고 고가령을 넘었다. 천산산맥(千山山脈)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마운령과 청석령을 넘고 우대령을 넘으니 삼류하(河)가 나타났다. 요동이 가까워졌다는 징표다.


@BRI@요동에 도착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요동이다.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망건 한번 고쳐 쓰지 못한 일행은 흡사 흉측한 산적의 몰골이었다. 우선 여관을 잡아 여장을 풀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여독에 찌든 육신을 누이고 싶었다. 의주를 떠나 온 지 15일째. 노숙의 연속이었다. 뜨끈한 구들에 등을 대자 모두가 떨어졌다. 퍼져버린 것이다.

이튿날 요동 구경에 나섰다. 변방의 작은 성이라 그런지 크지는 않았지만 견고해 보였다. 시전과 가옥들도 어딘가 모르게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둥그런 초가집도 보였다. 당나라시대 고구려 땅이어서 그럴까? 아직까지도 고구려의 흔적과 잔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휴식을 취한 일행은 다음날 이른 아침 요동을 출발했다.

끝간데 없이 펼쳐진 요동평야, 가슴을 뛰게 했다

압록강에서 요동까지는 산악지대를 통과하느라 하루 20~30리가 고작이었는데 요동을 지나 평야지대를 지나면서부터 사신 일행에 속도가 붙었다. 하루 60~70리는 보통이었고 100리를 주파하는 날도 있었다.

태자하(河)를 건너니 평야 지대가 끝없이 이어진다.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조국의 패망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가다가 진나라 군사에게 붙잡혀 목이 베어졌다는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하천이다. 영수사를 지나 장가대(臺)에 올라서 동서남북 어디를 바라보아도 산이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요동 벌 천리가 장관이었다.


땅 끝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땅 끝으로 해가 졌다. 말 그대로 사방이 지평선이다. 명나라가 큰 나라이고 명나라 땅이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나이가 땅에 대한 욕심을 내봄직 한 땅이라고 생각되었다. 대장부가 슬픈 일이 있을 때 대지(大地)에 무릎 꿇고 땅을 치며 통곡해도 남사스럽지 않을만한 땅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원 자신에게 아버지 이성계처럼 요동정벌군을 지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자신은 주저 없이 진격명령을 내렸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광활한 대륙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아버지가 왜 진격을 거두고 회군을 단행했는지 궁금했다.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알고 싶었다.


요동벌판을 호령하던 선조들의 말 발굽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장가대에 머무는 동안 요동 땅을 호령하던 선조들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드넓은 벌판을 말발굽 소리 우렁차게 내달리던 고구려인들의 모습이 환영이 되어 망막을 스쳐 지나간다. 대지를 진동하던 고구려 군사들의 함성이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았다.

수십 만 수(隋)나라와 군사들을 맞아 당당하게 한판 붙었던 그들은 적어도 감국(監國) 해달라는 비장의 카드를 들고 황제를 찾아가는 사신의 몰골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수십 만 당(唐)나라 군사들을 맞아 당당하게 한판 겨뤘던 그들은 적어도 인질이나 다름없이 끌려가는 자신과 같은 초라한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가대에서 요동 벌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광활한 대륙(大陸)에서 밀려나 비좁은 반도(半島)에 몰린 군상들이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모습이 한없이 좀스러워 보였다.

삼도파와 연대하를 지나고 산요포(浦)를 건넜다. 십리하(河)를 건너고 혼하(河)를 건너 심양에 들어갔다. 제법 큰 고읍(古邑) 같았다. 길도 지금까지의 길과는 격이 달랐다. 20여대의 수레가 한꺼번에 달릴 수 있으리 만큼 넓었고 직선으로 뻥뻥 뚫려있었다. 사통팔달로 뚫린 길 위에 식량과 벽돌을 실은 수레가 분주히 오고갔다. 물동량이 엄청났고 생동감이 있었다.

심양은 중국의 남방세력과 북방세력이 충돌하는 요충이다. 한족(漢族)이 심양을 장악하면 북방민족은 오랑캐가 되었고 북방민족이 심양을 손에 넣으면 한족은 그들이 오랑캐라고 경멸하는 민족에게 무릎을 꿇었다. 또한 우리(韓族)가 심양을 점령하면 중국과 우리는 대등한 관계였고 잃으면 속국이 되었다. 심양은 힘이 판세를 가르는 각축장이었다.

심양을 차지한 자가 대륙의 실력자였다

압록강에서 심양까지 오는 동안 "명나라가 과연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가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했는데 심양에서 비로소 전쟁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수레가 줄을 지어 북(北)으로 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대열은 상상을 초월했다. 수천 대에 이르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심양에서 북경까지만 해도 천오백리다. 헌데 북경에 황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경(금릉)에 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발길을 재촉했다. 아리강을 건너고 요하(遼河)를 건넜다. 진정한 의미의 중국 땅에 들어선 셈이다. 요하의 동쪽을 오랑캐가 사는 요동지방, 서쪽을 한족이 사는 요서지방이라 부른다. 요동은 백두산(장백산)권역에 속하며 요서는 장성(長城)권역에 속한다.

요하는 요수 또는 대요수라고 부르기도 하거니와 구려하(句麗河)라고도 불린다. 고구려 냄새가 물씬 풍긴다. 17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연개소문에게 패퇴하여 퇴각하던 당태종이 진펄에 갇혀 곤혹을 치른 발착수(渤錯水)가 바로 이웃이다. 요하의 발원지가 백두산(장백산)이어서 그럴까? 물의 색깔도 확연히 구분된다. 요하를 기준으로 요서지방에는 황토 빛 탁류가 흐르고 요동지방에도 압록 빛 맑은 물이 흐른다.

거류하를 건너 소흑산(小黑山)에 도착했다. 서해에 하나의 점으로 떠있는 섬이 소흑산도(小黑山島)라면 끝간데없이 펼쳐진 평야지대에 밥주발을 엎어놓은 것처럼 솟아있는 산이 소흑산이다. 좌우 천리에 펼쳐진 너른 들판이 가히 장관이다. 대릉하에 도착했다. 만리장성 영역이다.

지는 해와 떠오르는 태양

청돈대(靑墩臺)의 일출은 빼놓을 수 없다. 바다에서 불끈 솟아오른 태양이 압권이었다. 분명 바다에서 해가 솟았지만 그 바다의 끝은 어디인가? 생각해보니 황해도 장산곶이었다. 우리의 시각에서는 져버린 태양이 이곳에서는 떠오르는 태양이라? 묘한 생각이 들었다. 청돈대에 그려진 삼족오(三足烏)도 인상적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여기까지 미쳤을까?

동관역과 홍화포를 지나 산해관(山海關)에 들어갔다.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광역의 황성권이라 그런지 사람과 건물들이 촌스럽지 않고 세련되어 보였다. 시가지 곳곳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죽은 자와 산자가 함께 살아가는 고을 같았다. 때마침 장례행렬을 만났는데 관위에 하얀 장닭을 올려놓고 가는 것이 이채로웠다.

아직도 북경은 640리가 남았다. 황제가 있는 곳은 북경이 아니라 금릉(남경)이다. 지체할 수 없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청룡하를 건너고 풍륜성을 통과하니 눈에 익은 집들이 나타났다. 초가집이다. 고려보라는 중국속의 고려촌(高麗村)이었다. 난리통에 붙잡혀 온 고려의 유민들이 촌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우리네 풍습 그대로 흰옷에 벼농사 짓고 쌀밥 해먹으며 살고 있었다.

본국의 사신들이 반갑다고 떡을 만들어 내왔는데 한입 베어 먹으면서 목이 메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같은 민족을 만난다는 것이 너무나 반가웠고 그들로부터 우리의 음식을 대접받는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또한 이들이 머나먼 타국 땅에서 조국을 그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 바로 자신을 포함한 위정자들 때문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심히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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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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