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19회

등록 2007.01.23 08:20수정 2007.01.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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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화산파가 장문위를 밀고 있다는 사실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리고 굳이 그녀를 대동하고 운중보에 온 화산의 속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화산은 중원 최고의 문파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 중원 위에 군림하려 하는구나…."


"딸을 팔아먹은 부친의 유언(遺言)이었어요."

황용은 화산의 전대 장문인인 부친을 원망하는 듯했다. 그녀의 부친은 일생을 화산의 부흥에 몸바친 인물이었다. 결국 자살을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그 진위 여부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BRI@"저녁을 상부호와 같이 했더구나."

"당신이 화산파를 업신여겨 저녁식사조차 같이 하자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상만천의 판단은 빨랐고, 움직임은 기민했다. 화산은 누가 뭐래도 껍데기만 남은 소림과 무당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좋다.


"상부호 역시 장문위더냐?"

"속내는 달라도 목적은 같지요."


모두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도 목적이 같다면 언제든 적과도 손을 잡는 것이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의 행태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理念)이나 가치관(價値觀)은 한시라도 접을 수 있고, 의리(義理)나 도의(道義)는 똥통에 버릴 수 있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권력과 부의 속성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중심에서 밀려나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가진 권력과 부에 대해 지키려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후계를 정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결정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노력해 보지."

이리 쉽게 대답이 나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나 쉽게 대답이 나오자 황용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이미 보주 역시 장문위를 후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보주의 얼굴에서 진심을 파악하려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늙었다. 천하의 운중보주도 나이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이십육 년 전의 청년 같았던 그가 아니었다. 잔주름과 처진 피부. 얼굴 여기저기에 피어나고 있는 검버섯. 역시 그녀가 머릿속으로 만들어왔던 그 사내는 아니었다.

"고맙군요."

그녀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차 한 잔 대접받지 못했지만 그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더는 이 자리에서 미련을 가지고 대화를 더 나눈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는지 모른다.

"천하의 매봉검이니 가는 길에 별 탈은 없겠지."

데려다 주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황용 역시 애초부터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보주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듯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도 그렇지만 만약 이 늦은 시각 어두운 길을 두 사람이 걷는 것을 본다면 어떤 소문이 돌지 모르는 일이었다.

백양각까지의 거리 역시 겨우 백여 장 정도.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치마를 바닥에 끌며 열린 운중각 문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운중보주가 힐끗 주위를 살펴보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황촉불을 끄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운중보주가 안으로 들어간 지 일각 정도가 지나자 칠흑 속에 잠겨있던 문 바로 위 천장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일었다. 바람이 슬쩍 불면서 어둠이 뭉치는 듯한 모습이더니 검은 덩어리가 약간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형상이었다. 검은색 천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듯한데 여린 몸의 굴곡으로 보아 여인임이 분명했다. 그 흑영은 곧바로 운중각을 나서자마자 어둠을 뚫고 날아가고 있었는데 나는 모습이 마치 편복(蝙蝠)과 같았다. 몸을 은신하기 위해 덮었던 검은 천을 펴고 공기를 가르고 있었지만 속도가 빠르고 소리가 나지 않아 은신술과 경신술에 매우 뛰어난 여인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운중보주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은실술과 잠입술이 뛰어난 인물이라 해도 운중보주의 이목을 숨기기란 확실히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운중보주의 눈이 가늘게 떠지고 입술 끝이 말아 올라갔다.

"상만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너무 큰 모험을 하려고 드니…."

운중보주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63

"이제 그 친구를 놔줄 때도 되었네. 그 친구는 일생을 희생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성곤 담자기의 말이었다.

"그건 우리와 다를 바 없지. 그래도 그는 중원 제일인이란 권좌를 누리기라도 했네."

자연스럽게 중의는 성곤과 함께 주작각(朱雀閣)에 머물게 되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이기도 했지만 지금 상황이 너무 어지러운 탓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늦게까지 술잔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 껍데기 명성 말인가? 자신의 뜻대로 아무 일도 못했던 일인자의 허명이 그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을까? 우리는 그래도 마음대로 중원을 활보할 수 있었지만 그는 이 운중보가 세워진 이후로 어느 곳도 가지 못했네."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았네. 단지 그가 나가지 않았을 뿐이지."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네도 기억하나? 이 운중보가 세워진 직후 운중 그 친구가 한 말 말이네."

성곤이 술 한잔을 훌쩍 들이키고는 입가에 묻은 술 방울을 소매로 쓱 닦았다.

"이곳이 살아서도 자신의 무덤이오, 죽어서도 이곳에 묻히겠다고 했던 그 말 말이로군."

"왜 그가 그런 말을 했을까?"

취기가 오르는 듯 성곤의 얼굴이 불콰해졌다. 젊어서부터 두주불사(斗酒不辭)로 소문난 성곤이다.

"자네는 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군."

"당연하지 않은가? 허울 좋은 중원 제일인이었지만 그 뿌리는 회였네. 그 내막을 모르는 중원 무림인들은 그를 열렬히 지지했지만 그를 만든 것은 회였단 말이네. 그리고 그러한 내막이 밝혀지면 그 친구 자신은 물론 우리 동정오우조차 이 중원에 설 자리조차 없어질 것을 그 친구는 알았던 것이지."

"자네의 말은 운중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 가며 회가 원하는 쪽으로 자신의 거취를 정했다는 의미처럼 들리는군."

중의 역시 이미 취기가 오른 지 오래였다.

"적어도 우리 친구, 네 친구만큼은 그 사실을 부인하면 안 된다네."

성곤이 단정적인 말투로 말하자 중의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성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번 회갑연을 기화로 이곳을 떠날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가 후계를 정하고 무림을 떠난다는 말을 한 이후로 아주 심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네. 운중 그 친구가 이런 일들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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