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20회

등록 2007.01.24 08:14수정 2007.01.24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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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

성곤이 답답한 듯 술잔에 술을 채우고는 또 한 잔을 비웠다.


"자네는 나나 운중과 달리 회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이네. 추태감과 만보적, 그리고 철담 세 사람의 이견을 조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네였네. 운중 그 친구는 허울 좋은 중원 제일인이란 허명을 얻은 대신 사랑하는 처자식을 모두 잃었네."

"………!"

"그런데도 자네는 최근 들어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운중 그 친구가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 게로군."

@BRI@중의 역시 답답한 듯 잔에 술을 채우고 입가로 가져갔다.

"솔직히 말하지. 친구로서 이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될 것이지만 나는 운중이 관련된 정도가 아니라 이 모든 사건을 운중이 일으키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네."


말과 함께 중의는 독약을 마시듯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중의 자네…?"


"모든 정황이 운중이라고 확신하게 만들고 있네. 공교롭게도 시기적으로 너무나 맞아떨어지고 있어, 아니라고 생각하려 해도 어쩔 수 없네. 오늘 재보를 만난 이후 더욱 그런 확신이 굳어졌다네."

"회에서 기껏 지금까지 운중을 이용해 먹다가 이제 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운중 뿐 아니라 우리 동정오우 모두를 말일세."

성곤이 불쾌한 빛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흉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미 철담과 혈간 두 친구를 잃었다. 그런 와중에 친구로서 어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는 말투였다.

"자네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확신하는 데는 두 가지 근거가 있네."

"두 가지 근거…? 그 중 하나는 회의 분열이겠군. 하지만 회의 분열이 어찌 그의 탓이라고 생각하는가? 계기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진작부터 회 내부에서 오랫동안 쌓여온 것 아닌가?"

중의는 고개를 저었다.

"회의 분열은 그저 정황적인 것 중의 하나 일뿐이네. 내가 말하는 두 가지는 그것이 아니네."

"그럼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있단 말인가?"

성곤이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뜨자 중의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시 성곤의 술잔을 채우더니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어쩌면… 아니…."

중의는 말하는 것이 힘든 듯한 숨을 내몰아 쉬었다. 말을 꺼내면서 망설이고 있자 성곤이 답답한 듯 재촉했다.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어서 얘기해 보게."

"휴우…. 운중은 어쩌면 이십칠 년 전의 사건에 대해 그 내막을 알았을 수도 있네. 아니 이미 안 것 같네."

중의가 탄식을 터트리며 말하자 성곤의 얼굴에 당황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성곤 역시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말을 잊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지만 벌써 그 중 셋이 죽었네."

"죽은 사람이 철담과 혈간 말고 또 있단 말인가?"

중의가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동창의 서당두…. 그제 운중보에 들어왔다가 살해당한 서교민이란 자이지."

"서교민이란 자가 어떻게 그 내막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성곤은 서교민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자는 그 사건에 직접 개입했던 다섯 명 중의 한 명이라네. 그리고 그 다섯 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백정(白丁)의 자식으로는 감히 꿈꾸지 못할 동창의 당두에까지 올랐지."

"으… 음…."

성곤이 신음을 흘렸다. 중의가 확신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만약 운중이 이십칠 년 전 비명에 간 처자식 살해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다면 충분히 근거 있는 확신이었다.

"복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군."

"정말 내 생각이 맞는다면 나는 물론 자네도 이 운중보를 살아서 떠날 수 없을 것이네. 회갑연을 기화로 그는 그 내막을 아는 인물 모두를 이곳에 모았네. 아니 단 한 명…, 추산관 태감만 들어오면 모두 이곳에 있게 되는 것이지."

성곤은 난감한 표정을 띠었다. 어차피 그 사건에 관여는 하지 않았다. 뒤늦게 알았지만 이미 사건이 터진 후였고, 설사 그 이전에 알았더라도 그 사건을 막는 것은 자신의 능력 밖이었다. 체념하듯 어쩔 수 없이 모른 체했다. 이십칠 년이 지났지만 언제나 마음에 걸리던 일이었다. 헌데 정말 운중이 그 사건의 내막을 알았던 것일까?

"과연 추태감이 들어올까?"

아까 운중 그 친구는 분명 추산관 태감을 언급했다. 추태감이 들어온다면 동정오우를 회에서 제거하려 하는 것이 맞다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린 성곤이 심각하게 묻자 중의가 고개를 끄떡였다.

"아마 들어오게 될 것이네. 추태감은 당금 천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인물이네. 그가 유일하게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자식을 이곳 운중보의 후계로 만드는 일이야. 추교학을 후계로 만들려는 그의 집착은 무척이나 집요하고 무조건적이라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씨를 뿌릴 수 없다는 동물적인 강박관념 때문이겠지."

"물론 혈육에 대한 집착이기도 하겠지만 이번만큼은 회의 인물로 반드시 후계를 잇도록 하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네. 운중과 같이 회의 구성원이 아닌 인물을 내세워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과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하지 말자는 것이지."

"어쨌든 실질적으로는 철담이 모든 일을 처리해 왔지 않는가?"

"그것이 최근 들어 회에는 부쩍 부담이 되었던 것 같네. 만약 운중이 회가 결정한 일을 틀어버리면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기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네."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지 않은가? 운중은 절대 회의 결정을 틀어버리거나 반발한 적이 없었다고 기억하네."

중의는 고개를 저었다.

"있었네. 바로 구룡의 무공비급 문제 말이네. 우리 다섯이 구룡의 비급을 일년 넘게 보관하면서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운중 그 친구 덕분이었지. 회에서는 철담에게 그 비급을 얻는 즉시 천동(天洞)에 보관할 것을 결정했네. 그것을 운중이 거부했지. 그리고는 우리 모두가 충분히 그것을 연구하고 난 뒤에 철담에게 보관하라고 부탁했다네. 물론 철담이 그것을 회에 넘길 것이란 예상을 하고 넘겨주었겠지만 말이네."

"어쨌든 회의 뜻대로 된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았네. 구룡의 비급 중 두 권이 진짜로 분실되었네. 아니 교묘하게 필사한 것과 바꿔치기 당했지. 바로 구룡의 수뇌인 천룡(天龍)의 비급과 잠룡(潛龍)의 비급 말이네."

"우리가 그것을 철담에게 줄 때에는 분명 진품임을 확인했지 않는가?"

"그래서 이상하다는 말이네. 언제 어떻게 그 두 권의 비급이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네. 그리고 나는 용추에게서…."

중의는 말을 하다말고 멈췄다. 그리고는 목이 마르는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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