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27회

등록 2007.02.02 08:18수정 2007.02.02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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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비웃어라! 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는 그 순간에도 그럴 수 있는지 보겠다.'

사람이란 종종 타인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잘 알고 있는 사이라 해도 어느 날 갑자기 아주 생소해 보이는 행동이나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백도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듯 백도 역시 자신을 완전하게 알지 못할 것이다.


@BRI@마궁효에게는 한 가지 알려지지 않는 비장의 수가 있었다.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광나한 철호마저도 모르는 그것은 백도를 경악시키고 그 순간에 그의 허파에 코를 통해 들어간 공기가 아닌 직접 폐로 스며든 공기를 맛보게 해줄 터였다. 마궁효는 진기를 끌어올리며 쌍수를 쇠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준비되었소? 나보다 선배임을 감안하여 삼초(三招)는 양보하겠소. 그 안에 뭔가 해야 할거요. 만약 주어진 기회가 지나면 당신은 손을 쓸 틈이 없을 테니까 말이오."

점점 백도의 허풍은 광기로 보일 정도까지 치솟았다. 이것은 듣는 사람에게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동문수학한 사형제 간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래도 자신은 백도에게 무림 선배였다. 안하무인의 후배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소리였다.

이런 소리를 들은 무림인의 반응은 대개 세 가지 정도였다. 당장에 이성을 잃고 감정을 폭발시키며 공격하는 경우와 침착하게 상대가 한 조롱조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륜에 차이가 있는 점잖은 후배라면 대체로 허공에 허초식을 뿌려 버림으로서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겠지만 그것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당당함을 보이는 경우였다.

허나 마궁효의 태도는 매우 의외였다. 그는 더 이상 화를 내거나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비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백도의 제의를 고맙다는 듯 받아들였다. 그는 나직하게 웃었다.


"흐흐… 눈물나게 고맙군. 하지만 네 놈은 실수한 거야. 삼초 후에는 뼈저리게 후회하는 네 모습을 보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는 승부가 무엇인지 아는 인물이었다. 허풍이나 과시는 승부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인물이었고, 이긴다는 것이 모든 과정을 합리화시킨다는 사실마저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승부에 있어 선공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삼초의 여유는 그에게 이길 수 있는 확률을 삼할(三割)이나 높여 놓았다. 하지만 삼초 안에 그를 어쩌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타인의 눈도 의식해 비장의 수는 그 이후에 쓸 생각이었다.

"……!"

백도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모멸감에 대한 노기와 함께 은근한 자신감이 떠오르며 금석을 두부처럼 파괴할 수 있다는 그의 쌍수가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우수가 오른쪽 가슴 옆에 자리하고 좌수가 굽어진 채 앞으로 나선 가장 일반적인 자세. 팽팽한 긴장감이 공기를 찢을 듯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헌데 백도와 마궁효의 승부가 시작되려는 그 순간이었다. 주위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 쏠려 있는 사이에 백호각에 다가드는 두 개의 음영(陰影)이 있었고, 그 중 하나는 백호각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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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高胤)은 죽어가고 있었다. 개 같은 목숨이 남아있을 때 칠호(七號)로 불리었던 저 편에 걸려있는 최관우(崔寬佑)는 이미 어젯밤 죽은 것 같았다. 애석해 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있어 삶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미 육체의 고통은 잊은 지 오래였다. 육신은 돌처럼 마비되었고 혈맥이 굳어 찢어진 상처에서도 피가 배어 나오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살고자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살아만 있다면 누군가 자신을 구출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거나 운이 좋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까지 죽지 않고 있는 자신의 끈질긴 숨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죽어가고 있는 이 순간에 있어서 그의 단편적인 기억에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그의 부모님이었다. 부모에 대한 죄송스러움과 죄책감만이 그를 괴롭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하남(河南) 주구(周口) 출신인 그는 그 지역에서는 향시에 합격해 행세께나 한다는 부친과 푸근하거나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억척스럽게 조상이 남겨 준 땅마지기로 먹고사는 데는 어렵지 않게 만들어 준 모친이 있었다.

열 다섯 살까지의 삶은 누구보다 행복한 삶이었다.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란 소리를 들었던 고윤은 모든 이들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집안의 재물과 가보를 들고 야반도주할 그 때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인이 죽었지만 그는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 삶을 포기한 자에게 다가온 비영조의 기회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리란 것은 고윤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면 모든 것을 털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부모님께 용서를 빌고 효도를 하며 살고 싶었다.

"고형…."

이미 육신의 기능은 모두 마비되었지만 고막만큼은 찢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먼 나락(奈落)에서 들려오듯 아주 나직하고 낯익은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리고 있었다.

'설조장(雪助長)!'

아까 인지 아니면 며칠 전인지 알 수도 없었고,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지만 설조장과 능조장(凌助長)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환청을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살아남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또한 살아있다 해도 버젓이 자신의 주위에 나타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분명히 설조장의 목소리였다.

'바보 같은 사람….'

고개를 들 힘도 입을 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두뇌의 사고만이 단편적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곁에 나타난 설중행을 속으로 욕했다.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인가? 무사히 도망쳤으면 멀리 도망가 살 궁리를 할 것이지 왜 자신을 찾아온단 말인가? 철기문의 인물들이 얼마나 지독하고 무서운지 모른단 말인가?

"나는… 당신… 을… 모…."

메마른 입술과 혀는 말이 나오지 않게 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하고 싶었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 가라… 빨리 가라…'라고. 그것이 고윤이 설중행에게 해줄 수는 유일한 말이었지만 마저 끝맺지 못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이 바보 같은 자식이 정말로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일까? 이미 꺼져 가는 생명이다. 구해준다고 자신이 살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접은 지 오래였다. 할 수 있다면 소리치고 싶었다.

-이 멍청한 자식아! 너나 잘 살란 말이다.-

그의 바램과는 달리 자신을 묶고 있는 쇠사슬이 긁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죽어 가는 이 육신과 더불어 어떻게 도망치려하는 것일까? 이것은 확실히 미친 짓이었다. 어떻게 하든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우려대로 또 다른 음성이 나직이 그의 고막을 때리고 있었다.

"올 줄 알았지!"

신기수사 옥청량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미세한 움직임이 일며 살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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