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가 녹우당에서 이룬 문예부흥

학문과 예술의 교유 공간 '녹우당'... 추사, 다산, 소치 등에 영향

등록 2007.02.15 09:46수정 2007.02.15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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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사랑채.사랑채는 교유의 공간이다(작년 여름사진)
녹우당 사랑채.사랑채는 교유의 공간이다(작년 여름사진)정윤섭
@BRI@해남윤씨가의 종택인 녹우당에 들어서면 사랑채에 붙은 ‘녹우당(綠雨堂)’이라는 현판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녹우당이라는 한자의 의미를 해석하여 각별하게 그 의미를 부여하고자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 녹우당이라는 당호의 명칭은 공재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옥동 이서가 써준 것으로 녹우당의 뜻을 해석할 때 보통 녹우당 고택 앞에 서있는 고목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녹우당’ 이라 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고택 뒤에 있는 푸른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의 한시나 옛 선비들이 절개나 기상을 표현할 때에 자주 사용하였던 말로 ‘녹우(綠雨)’를 말하는 것을 볼 때 공재와 절친한 사이였던 옥동 이서가 공재의 철학과 학문적 사고에 견주어 ‘녹우당’이라는 당호를 지어주지 않았나 보고 있다. 녹우(綠雨)는 절기로 볼 때 4월 하순 곡우에서부터 신록의 자연에 성장의 동력과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비로 공재의 학문과 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옥동 이서가 이러한 의미를 담아 지어준 것이라는 것이다.

문화예술의 교유 공간

작년여름 도올선생이 방문했을때의 녹우당. 오래전에도 이러한 석학들이 교유했을 것이다.
작년여름 도올선생이 방문했을때의 녹우당. 오래전에도 이러한 석학들이 교유했을 것이다.정윤섭
사랑채에 걸린 '운업'현판. 녹우당 당주들의 이상이 담겨있다.
사랑채에 걸린 '운업'현판. 녹우당 당주들의 이상이 담겨있다.정윤섭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를 놓고 볼 때 예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가장 화려한 문예부흥의 시기가 공재 윤두서가 살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산 윤선도의 비중이 가장 크기는 하지만 공재 윤두서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 낙서 윤덕희, 청고 윤용에 이르기까지 예술 활동과 이 집안의 고문서들이나 작품들이 이때를 중심으로 집대성된 것이다. 지금까지 녹우당에 이처럼 많은 문화유산이 잘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당시에 그동안 내려온 유산들을 잘 정리해둔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옛 양반가에서 사랑채는 사대부들의 학문과 교류, 그리고 시인묵객들이 오가는 예술의 장이 되었지만 그 문화적 영향을 놓고 볼 때 녹우당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재가 추구했던 실학이라는 학문적 영향 말고도 그가 남긴 그림(회화) 세계는 이후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녹우당이 예술과 학문의 공간으로 만들어지게 한 것이다.

공재가 이룩한 당시의 학문과 예술 문화적 성과들은 곧바로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녹우당, 대흥사를 중심으로 머물고 간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원교 이광사, 소치 허유 등 당대의 석학들이 남긴 문화적 중흥은 문예 부흥기를 연상시킨다.


실학의 완성자인 다산 정약용이 실학을 집대성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배경이 있을 수 있지만 남인이라는 정치적 배경과 함께 다산의 외가인 해남윤씨가와의 관계 속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다산의 어머니 윤씨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으며, 공재는 다산의 외증조가 된다. 다산은 정치적으로 남인이었으며 남인과의 교류를 통해 실학이라는 학문을 접할 수 있게 된 배경은 해남윤씨가와의 여러 공통성을 갖게 한다.


공재와 다산은 시기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정치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비슷한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공재의 외손인 다산이 서울에서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공재가를 오가며 받았을 영향과 유배시 해남의 녹우당과 교류를 가졌던 것을 본다면 공재의 다산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다 할 수 없다.

정약용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자주 외갓집에 갔다. 공재는 서울의 중심지인 종현(지금의 종로)에 집이 있었다. 정약용은 어머니를 따라 종현에 있는 외갓집엘 갔으며, 정약용은 일찍이 선대 윤선도의 글과 외증조부 공재 윤두서가 그린 그림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귀한 책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외갓집에는 모든 것이 풍족했지만 특히 학문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귀한 책들이 서가에 수천 권 빽빽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윤씨 집안 대대로 물려받아 잘 보관된 유산들이었다.

추사·원교·소치 등에 미친 영향

사랑채에 걸린 '정관'현판.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사랑채에 걸린 '정관'현판.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정윤섭
우리나라에서 한국적 화풍이 더욱 뚜렷이 나타나게 된 것은 조선후기(18∼19C)다. 이때는 남종문인화의 영향이 뚜렷한 시기였으나 화풍, 화제에서 조선화풍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또한 김정희가 추사체로 불리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기도 하였다. 추사와 원교 이광사는 학문적으로 실학적 학풍을 계승하고 있고 동국진체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공재 윤두서 집안과의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곳 해남윤씨가 녹우당은 조선후기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로 대표되는 석학들이 이곳 녹우당과 대흥사를 무대로 학문과 예술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현재 녹우당과 대흥사에는 추사와 원교의 글씨가 남아있어 이들과의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또한 남종문인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은 녹우당에 와서 공재의 그림을 보며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였고, 추사 김정희의 제가가 되어 남종문인화의 화풍을 완성시켰다는 데에서 많은 연관성을 가질 수 있다.

소치 허유는 초년에 녹우당에서 윤두서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아 그곳에서 윤두서의 화풍을 익혔다. 이 때문인지 현종에게 올린 산수화첩 등 초기 작품에는 윤두서에 계승된 전통화풍의 잔영이 남아있다.

소치는 30대 초반 대흥사의 초의선사에게 소개를 받아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갔고, 1839년 상경하여 본격적으로 서화 수업을 받았다. 소치는 김정희를 통하여 왕공사대부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그가 접촉하였던 인물로는 해남의 우수사 신관호(申觀浩),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丁學淵) 외에 권돈인,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등 당대의 유명인들이었다. 스승인 김정희는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고 할 정도로 소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산수화를 비롯한 소치의 회화는 중국 남종화와 스승인 김정희를 섭렵한 것이지만 독창적인 화법도 개척하였다. 그의 이러한 화법은 만년의 그의 산수화에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같은 그의 회화관으로 인해 그를 남종문인화의 대가로 평가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고 있다.

소치가 공재의 산수화를 묘사하던 수습단계에서 방황자구벽계청장도(倣黃子久碧溪靑장圖),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를 그렸던 초기 추사 문하의 방작들도 뛰어났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후기 고산 윤선도 고택을 중심으로 한 해남의 녹우당은 학문뿐만 아니라 예술의 분야에까지 많은 학자들과 서화가들이 교류를 이어갔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흥사에 걸린 추사의 글씨 '무량수각'
대흥사에 걸린 추사의 글씨 '무량수각'정윤섭

덧붙이는 글 |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덧붙이는 글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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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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