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채에 걸린 '운업'현판. 녹우당 당주들의 이상이 담겨있다.정윤섭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를 놓고 볼 때 예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가장 화려한 문예부흥의 시기가 공재 윤두서가 살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산 윤선도의 비중이 가장 크기는 하지만 공재 윤두서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 낙서 윤덕희, 청고 윤용에 이르기까지 예술 활동과 이 집안의 고문서들이나 작품들이 이때를 중심으로 집대성된 것이다. 지금까지 녹우당에 이처럼 많은 문화유산이 잘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당시에 그동안 내려온 유산들을 잘 정리해둔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옛 양반가에서 사랑채는 사대부들의 학문과 교류, 그리고 시인묵객들이 오가는 예술의 장이 되었지만 그 문화적 영향을 놓고 볼 때 녹우당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재가 추구했던 실학이라는 학문적 영향 말고도 그가 남긴 그림(회화) 세계는 이후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녹우당이 예술과 학문의 공간으로 만들어지게 한 것이다.
공재가 이룩한 당시의 학문과 예술 문화적 성과들은 곧바로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녹우당, 대흥사를 중심으로 머물고 간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원교 이광사, 소치 허유 등 당대의 석학들이 남긴 문화적 중흥은 문예 부흥기를 연상시킨다.
실학의 완성자인 다산 정약용이 실학을 집대성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배경이 있을 수 있지만 남인이라는 정치적 배경과 함께 다산의 외가인 해남윤씨가와의 관계 속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다산의 어머니 윤씨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으며, 공재는 다산의 외증조가 된다. 다산은 정치적으로 남인이었으며 남인과의 교류를 통해 실학이라는 학문을 접할 수 있게 된 배경은 해남윤씨가와의 여러 공통성을 갖게 한다.
공재와 다산은 시기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정치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비슷한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공재의 외손인 다산이 서울에서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공재가를 오가며 받았을 영향과 유배시 해남의 녹우당과 교류를 가졌던 것을 본다면 공재의 다산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다 할 수 없다.
정약용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자주 외갓집에 갔다. 공재는 서울의 중심지인 종현(지금의 종로)에 집이 있었다. 정약용은 어머니를 따라 종현에 있는 외갓집엘 갔으며, 정약용은 일찍이 선대 윤선도의 글과 외증조부 공재 윤두서가 그린 그림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귀한 책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외갓집에는 모든 것이 풍족했지만 특히 학문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귀한 책들이 서가에 수천 권 빽빽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윤씨 집안 대대로 물려받아 잘 보관된 유산들이었다.
추사·원교·소치 등에 미친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