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바보 온달'인가, '장군 온달'인가

[온달 이야기 해부 ①] 국가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 '온달'

등록 2007.02.28 15:13수정 2007.03.0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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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평강 공주와 온달 조각상

평강 공주와 온달 조각상 ⓒ 김성원


한국 사회에서는 특정 인물이 특정 관념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바보 하면 온달, 효녀 하면 심청, 열녀 하면 춘향이 떠오른다. 이 외에도 기생 황진이, 성웅 이순신, 천재 아이슈타인, 발명왕 에디슨 등과 같이 보통명사와 고유명사가 단짝처럼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다.

@BRI@그런데 온달의 경우에는 자신의 이름 앞에 따라다니는 타이틀이 조금은 억울할 것이다. 자신의 인생은 ‘장군’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데 ‘장군 온달’ 대신 ‘바보 온달’이라고만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배운 한국인들은 어쩌다 한 번씩은 이 이야기에 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있을 것이다. 바보 하면 온달이 떠오르는데, 잠시 후 그 온달이 고구려 장군이었다는 생각에 도달하면 ‘무슨 바보가 장군이 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의문은 다시 얼마 동안의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바보 온달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온달이 적어도 바보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는 고구려 장군으로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그리고 평민의 신분을 극복하고 대제국 고구려의 부마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삼국사기> 권45 열전5 온달조(條)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인들은 지능이 아닌 외모를 보고 그를 바보라고 불렀을 뿐이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떨어진 옷과 헤어진 신으로 시장에 왔다 갔다 하면서” 밥을 구걸하는 온달의 모습을 보고 그런 호칭을 붙인 것이다. 이는 온달이 ‘바보 온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효자 온달’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온달의 어머니가 공주를 처음 만났을 때에 자기 아들의 외모를 묘사한 말에 따르면, 온달은 요즘 말로 하면 상당한 ‘얼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이 가까이 할 인물이 못 됩니다” 이처럼 온달은 그 외모 때문에 바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오로지 외모 때문에 그가 역사적으로 바보 온달로 알려지게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신의 외모를 상쇄시키는 능력과 효심이 더 탁월했기 때문이다.


온달의 아내 이름은 ‘평강공주’가 아니다

그렇다면, ‘장군 온달’ 혹은 ‘효자 온달’ 대신 ‘바보 온달’이 특히 부각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사뿐만 아니라 중국사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온달이라는 평민 출신 부마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6세기 후반 중국 대륙에 불기 시작한 통일 열기와 그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비상 대응이라는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달 이야기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제25대 평강태왕(혹은 평원태왕, 재위 558~588년), 평강태왕의 공주, 온달의 3각 관계를 분명히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흔히 ‘평강공주’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평강태왕의 공주’가 그렇게 와전된 것이다. 세종 임금의 공주를 ‘세종공주’라고 할 수 없듯이, 평강태왕의 공주 역시 ‘평강공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공주의 실명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온달과 공주의 결혼이 역사 속에 길이길이 남을 정도의 대사건이었다면, 공주의 이름이 알려지는 게 자연스럽다.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삼국사기> 온달조에 상세하게 알려질 정도라면, 또 그것이 동아시아 대제국 고구려의 공주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공주의 실명이 역사책에 기록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그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평강공주로만 알려져 있다.

여기서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당시 고구려인들에게는 온달 이야기에서 공주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공주와 온달의 결혼이 아니라 평강태왕과 온달의 결합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더 인상적이었기에, 공주의 신상에 관해서는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여, <삼국사기> 온달조의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 5가지다. (1)온달은 지능이 아닌 가난과 외모 때문에 ‘바보’로 불리게 되었다 (2)고구려 평강태왕은 온달이 평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위로 받아들였다 (3)온달은 무예가 뛰어나고 용감한 인물이었다 (4)온달은 북주 무제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5)평강태왕 사후에 온달은 스스로 위험한 전쟁에 뛰어 들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위 5가지 포인트와 당시의 국제정세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온달이라는 인물이 고구려의 최고 엘리트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와 그가 ‘바보 온달’이라는 네임밸류(name value)를 1500년이 되도록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하게 될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 ‘온달’

a 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정세.

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정세. ⓒ <간명중국역사지도집> 편집

흔히 사회 시스템이 위기에 봉착하면 엘리트 충원 방식도 바뀌게 된다. 안정기에는 기존의 상층계급에서 새로운 엘리트가 충원되지만 변화기에는 하층계급에서 새로운 엘리트가 충원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평강태왕 시기가 바로 그러했다.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7 평원왕조에 따르면, 이 시기에 중국에 대한 조공이 유난히 많이 발견된다. 당시 조공은 국제무역과 국제정치의 매개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조공이 유난히 많았다는 것은 국제친선을 위한 시도가 많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평강태왕 시기는 국내적으로는 안정된 시기였지만, 국제적으로는 국제친선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할 만큼 불안한 시기였던 것이다.

당시 중국 대륙에는 제(북제)·진·주(북주)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이 세 나라와 국제친선을 도모하고 있었다. 점점 몸집이 커가는 중국의 3국을 상대로 평강태왕은 전쟁을 도모하기보다는 가급적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시간을 벌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중국에서는 통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중국의 통일 열기는 589년 수나라의 중국 통일로 귀결된다. 평강태왕이 물러난 그 해에 중국이 통일된 것이다.

그런데 위 세 나라 중에서 북주와의 관계는 비교적 늦게 개설되었다. 북제·진과는 평강태왕 재위 초반부터 평화관계가 개설되었지만 북주와는 이보다 훨씬 뒤인 재위 19년(577년)에 가서야 평화관계로 정착된다. 처음에는 고구려와 북주가 국경을 직접 맞대지 않았지만 북주의 동진(東進)으로 양국이 맞닥뜨리게 되면서 두 나라의 관계가 본격화된 것이다. 온달의 전격 등장은 바로 이 북주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달은 북주의 무제(재위 560~577년)가 요동을 치기 직전에 중앙정계에 등장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온달이 정확히 언제 등장했는지를 알려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북주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에는 무제의 고구려 침공에 관한 이야기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이는 아마도 북주가 이 전쟁에서 실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북주의 고구려 침공 시점은 논리적 방법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북주 무제는 집권 초반과 후반에 각각 대규모 침략전쟁을 벌였는데, 초반 때의 전쟁에서는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후반에서야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북주와 고구려 사이에는 돌궐과 북제가 있었으므로, 북주가 고구려를 침공하려면 이 두 지역과의 전쟁에서 먼저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북주의 고구려 침공 시점은 무제 집권 후반부인 577년경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북주의 파죽지세는 당시 고구려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일이었다. 북주는 576년에 토욕혼(북주의 서쪽)과 진을 물리치고 577년에는 북제까지 멸망시켰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북주와 직접 맞닥뜨리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북주의 섭정인 양견이 선양(禪讓)을 받아 수나라를 세우고 통일을 이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북주의 대약진은 동아시아 의 판도를 바꿀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이처럼 6세기 후반의 고구려는 북주의 동진(東進)이라는 새로운 위기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3세기 이후 중국의 분열기를 활용하여 요동·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중국의 통일열기가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 시스템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새로운 엘리트 혹은 새로운 영웅이 평민 속에서 튀어나오기 쉽다. 기존 시스템과 기존 인물로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온달이었다.

영웅으로 급상승한 온달의 성공신화

<삼국사기> 온달조에 의하면, 북주의 고구려 침공 직전에 열린 수렵 행사에서 온달은 평강태왕의 눈에 띄게 된다. “그 (말) 달리는 품이 항상 남보다 앞에 서고 포획하는 짐승도 많아서…… 왕이 불러 그 이름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자신의 눈앞에 선 용맹한 무사가 한때 바보로 유명했던 온달이라는 점에 평강태왕이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수렵행사에서 태왕의 신임을 얻은 온달은 그 직후 고구려가 북주 무제의 침공에 맞서 싸울 때에 고구려군 선봉장을 맡게 되었다. 이처럼 온달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예가 매우 출중했다는 점 ▲고구려인들이 새로운 인물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점 ▲공주와 이미 동거하고 있었던 온달을 평강태왕이 신임했다는 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혜성처럼 등장한 온달의 대활약 덕분에 고구려는 북주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고구려는 다른 나라들처럼 북주에게 멸망되지 않고, 대신 북주와 화친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온달이 고구려의 국난 극복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전승국이 패전국에게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전승국이 군사력에서는 앞섰지만 경제력·문화력에서 뒤지는 경우가 이에 해당했다. 조공을 하면 더 많은 회사(回賜, 답례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 주변의 민족들은 중국을 군사적으로 꺾은 다음에 형식적으로 조공을 하고 실질적으로 더 많은 회사를 챙겨 가곤 하였다. 고구려도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그런 방식을 택했다.

맹렬하게 동진하는 북주의 기세를 꺾고 평화관계를 정착시켰으므로, 온달의 명성이 드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전승 후에 온달은 정식으로 부마가 되었다.

▲가난한 평민이 공주와 결혼하고 ▲공주가 궁궐에서 갖고 나온 ‘보물 팔찌 수십 개’를 기반으로 무예를 배워 고구려의 장군으로 발탁되고 ▲서토의 강자 북주를 물리쳐 평화관계를 구축하고 ▲태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스토리는 대단한 성공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바보 온달’의 신화는 바로 이때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평민에서 부마로 또 영웅으로 급상승한 온달의 성공 신화를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각색하기 위하여 그가 이전에 ‘바보’였음이 크게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평민 온달이 영웅이 되었다는 이야기보다는 바보 온달이 영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고구려인들 사이에서 훨씬 더 빨리 파급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보 온달’의 신화는 고구려 평민들에게는 영웅담이었지만, 기득권 지배층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 듯하다. 온달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고구려 지배층에게 위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고구려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바보 온달’이 온달을 폄하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온달의 입장에서는 ‘영웅 온달’보다는 ‘바보 온달’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 고구려 귀족들의 견제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도 잘난 척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지배층 내에서 온달 장군의 불리한 입지는 후원자인 평강태왕의 사후에 그 스스로 영웅적 죽음을 선택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점에 관하여는 마지막 2편에서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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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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