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47회

등록 2007.03.08 08:20수정 2007.03.08 08:20
0
원고료로 응원
“또한 당신 때문에 고생한 그 아이에게 당신이 만든 구양단(九陽丹) 한 알 정도도 먹였으면 좋겠고….”

“말도 안 되는 소리!”


@BRI@구양단(九陽丹)은 중의가 수백 종류의 영물과 약초를 배합해 만들었다는 영단(靈丹)이었다. 소림의 대환단(大還丹)이 실전(失傳)되어 사라진 이후 대환단의 효력을 능가한다고 알려진 것이 바로 구양단이었다. 제조기법도 어려웠지만 구하기 어려운 약재가 많아 중의마저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것이었고, 또한 중의 역시 모두 일곱 개를 만들어 지금은 단지 두 알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구양단이 포대 선생의 목숨보다 더 귀중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또한 말로는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친구 사이에 그 친구 아들에게 구양단 한 알 주는 것이 뭐 그리 아깝소? 더구나 그 동안 친구에게 몹쓸 짓도 했는데 그 정도는 해주어야 하지 않겠소?”

중의의 몸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저놈은 하는 말마다 자신의 아픈 곳을 헤집고 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상처를 찔러대고 있었다. 스스로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합리화시켰던 아픈 상처들을 하나하나 헤집어 찔러대고 있는 것이다.

“정말 네놈은….”

“죽이고 싶겠지만 참으시오. 지금까지 그토록 참아온 포대 선생이 이깟 일로 공든 탑을 허물어 버리면 되겠소? 더구나 추산관 태감과 함께 아주 원대한 대업(大業)을 이루어야 할 분이 말이오. 앞으로 기회는 많소. 다만 지금 거래가 끝나더라도 나에 대해서는 섣불리 어쩔 생각은 마시오. 나는 아직 젊어 포대 선생만큼의 인내심이 없으니까 말이오.”


이것은 협박이었다. 중의가 지금 극도의 인내심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만에 하나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끝까지 참고 있는 이유가 바로 저놈이 말하는 대업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놈은 함부로 자신의 내력을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도 하고 있다. 중의가 지켜야 할 비밀이 발설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듯 저놈도 자신의 내력이 발설됨을 똑같이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어린놈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는군. 좋아… 참지.”

죽여야 할 놈이다.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원대한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놈이다. 허나 지금은 저놈 말대로 참아야 한다. 만에 하나 저놈이 자신의 손속을 피하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날엔 모든 것이 끝난다. 저놈은 나이답지 않게 매우 신중한 놈이라서 뭔가 다른 궁리를 하고 자신을 찾아왔는지 모른다. 나름대로 자신이 없다면 이리 떳떳하게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오년 전부터 철저하게 조사하고 연구한 놈이다. 그 반면에 자신은 저놈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상대는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자신은 상대를 모른다. 그렇다면 대화든 승부든 그 결과는 뻔하다. 이럴 때는 오히려 머리를 쓰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은 방법이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면서 반전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

“아주 현명한 선택을 하셨소.”

중의의 전신에서 무섭게 뿜어 나오던 기세가 수그러들자 능효봉 역시 긴장된 몸을 잠시 이완시키면서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참으로 이상한 놈이로구나. 그 녀석이 누군지 몰라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나는 한 가지 빚을 진 것이 있소. 내가 받아야할 빚을 완전하게 회수하려면 먼저 내가 진 빚을 갚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오.”

“누구에게? 그 녀석에게 빚을 진 적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오. 그 부친 되는 사람에게 진 빚이 있소.”

“……?”

중의는 능효봉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녀석의 부친이라면 바로 운중이다. 천룡의 후예로서 운중에게 반드시 받아야할 혈채가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수긍이 가는 일이었지만 그에게 진 빚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본 적이 없지만 당신은 나를 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소. 이십칠 년 전 보주가 중원을 한바퀴 돌 당시 팔 개월 동안 데리고 다니던 아홉 살짜리 꼬마를 기억하시오?”

“그럼 그 아이가?”

중의는 더 이상 놀랄 기력도 없었다.

“그렇소. 그 아이가 바로 나였소.”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밀려들었다. 그 아이였다. 그래서 회에서 그리도 찾아 헤맸음에도 찾지 못했다. 설마하니 운중이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천룡의 후예를 데리고 다닐 것이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저 놈도 결코 범상한 놈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분명 부친을 죽인 원수의 손에 이끌려 다니면서도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운중은 왜 저 아이를 데리고 다녔을까?

당시에는 그저 중원을 유람하다 쓸만한 제자 하나 거두어들인 것으로 생각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간혹 여러 문파를 돌면서 그 문파의 독문비기에 대해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허나 운중보로 돌아온 운중은 혼자였고,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누가 물어본 적도 없었다.

“결국 그랬던 것이군.”

이제야 과거 어느 시점부터 보였던 운중의 애매한 태도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운중이 동정호 군산혈전 때 자진한 천룡과 어떤 약속을 했는지 몰라도 아마 저 아이를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회에서 구룡의 후예를 제거해 나가기 시작하자 운중은 아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다니며 보호했을 터였다.

왜 진즉에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 당시 운중의 애매한 태도를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으면 분명 연관이 있는 아이라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랬을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사실 도저히 연관시킬 수 없는 일이었다.

‘운중을 버리고 철담을 택한 회의 결정은 확실히 올바른 선택이었다.’

운중이 회의 중심인물이 되지 못하고 철담을 택한 것에 대해서는 중의 역시 약간은 의아스러운 부분이었다. 허나 지금에 와서 보면 확실히 탁월한 선택이었다. 조직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바로 모호함이나 애매함이다. 조직의 목적과 다른 방향의 목적을 가졌거나 조직의 목적에 회의를 가진 인물이라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회의 수뇌로 만드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띵한 머리 속에서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결국 구룡의 신화를 종식시킨 이후부터 동정오우의 우의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누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서로 추구하는 목표가 달랐고, 무엇보다 운중의 처자식이 죽은 사건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틈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그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성곤은 언제나 운중에게 미안해했고, 철담과 자신은 되도록 운중을 만나지 않으려 했다. 운중보에 같이 머물면서 운중을 피해야 했던 철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래도 가장 마음 편한 친구는 혈간이었다. 그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사건의 내막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천룡의 후예를 감싸고돌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운중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말의 미안한 감정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 역시 자신의 처자식이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그 내막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천룡의 후예를 보호했던 것은 회에 대한 복수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훌쩍 일년 동안 중원을 유람한 것은 그것을 계획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 때가 무르익자 눈앞에 있는 이놈과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닐까?

벼라 별 생각이 빠르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모든 사건들이 확실하게 연관을 지으며 형체를 갖추는 것처럼 보였다.

“네가 지금 노부에게 부탁한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는 있는 것이냐?”

이제 넌지시 이놈의 속내를 떠보아야 했다. 정말 운중과 이놈이 확실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2. 2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3. 3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4. 4 행담도휴게소 인근 창고에 '방치된' 보물 행담도휴게소 인근 창고에 '방치된' 보물
  5. 5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