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46회

등록 2007.03.07 08:23수정 2007.03.0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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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더니….”

가장 가까운 곳에 적이 있다는 말은 확실히 옳은 말이었다. 어느 순간 추적의 끈을 놓쳐버리고 이십칠 년이 지났다. 그리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의는 내심 서늘한 기운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BRI@“하지만 그런 나 역시 어제는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

아주 재미있는 듯, 또한 약간은 감탄하고 있다는 듯한 말에 중의는 눈 꼬리를 살짝 치켜 올렸다.

“놀랐다니… 무슨 뜻이냐?”

“나는 포가장에서 포대 선생을 몇 번 본 적이 있소. 동정오우 중 중의라는 인물이 그 포대 선생이라는 말은 정말 믿기 힘들었소. 어제 처음 본 중의라는 인물의 모습 속에서는 고매한 인격과 현학적인 기도를 가지고, 언제나 허리와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포대 선생의 분위기나 외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소. 지금도 나는 중의이자 포대 선생인 당신의 뛰어난 역용술(易容術)에… 특히 변한 모습에 따라 기질과 분위기마저도 완벽히 연출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정말 감탄하고 있소.”

완벽하게 함정에 빠진 느낌이었다. 저 놈의 말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자신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연구했다는 점보다는 그리 조심을 하며 반평생을 살았으면서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 더 화나게 만드는 일이었다.


“……!”

멍한 정신을 되돌리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너무나 당황스러워 생각을 수습하는 일마저도 쉽지 않았다. 중의는 연거푸 세 잔의 차를 비운 후에야 마주 앉아 있는 능효봉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아주 어려운 두 가지 선택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때였다. 이 자리에서 저놈을 죽이든 아니면 자신이 죽든 결판을 내든가 아니면 저놈에게 완전히 백기를 들고 사정을 하든가 해야 했다. 허나 성급한 결정을 하기 전에 한 가지 확인이 필요했다.

“이것은 거래인가? 아니면 협박인가?”

“거래면 어떻고, 타협이면 어떻소? 아주 간단하게 합시다. 포대 선생이 내 부탁을 들어주면 우리는 오늘 서로 만난 것이 없는 거요. 한 말도 없고 들은 바도 없게 되는 것이오.”

너무나 간단했다. 다른 조건도 없었고 더 이상 따질 일도 없었다. 하지만 따지고 들어간다면 너무나 위험한 거래였다. 양쪽 모두 서로에 대한 치명적인 목줄을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능효봉이 알고 있는 사실이 유포되면 중의는 중원 천지 그 어느 곳에도 발붙이지 못하게 된다. 아니 당장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또한 이제 능효봉이 누군지를 안 중의가 그 사실을 알리게 되면 능효봉 역시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서로 비밀을 지키자고 약속한다고 해서 지켜질 일도 아니었다. 능효봉이 아예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하자는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과거의 혈채와 별도라는 말 역시 왜 꺼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었다.

“어쨌든 노부가 손해를 보는 것이군.”

능효봉의 내력을 알았다는 것은 큰 수확이지만 서로 비밀을 지킨다면 중의로서는 얻는 것이 없이 능효봉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니 손해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은 인과(因果)에 따른 응보(應報)이지 포대 선생이 손해 보는 것은 결코 아니오.”

능효봉의 이해하지 못할 말에 중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뜻인가?”

“내가 부탁하려는 것은 바로 포대 선생이 저질러 놓은 아주 못된 짓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는 일이기 때문이오.”

“아무리 지금 노부의 목줄이 자네에게 들려있다 해도 말을 함부로 하고 있군. 노부는 지금 무척이나 인내하고 있다네.”

정말 중의는 많이 참고 있었다. 참는 것은 그의 몸에 배인 습관이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를 당해보지 않았던 터라 참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능효봉은 등을 의자에 대고 있다가 두 팔을 탁자 위에 올리며 상체를 약간 숙였다.

“참고 있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요. 혈채를 받아야 할 상대를 두고 이런 대화나 하고 있는 내가 더 한심스럽소. 더구나 그 대화의 상대가 구룡의 신화를 무너뜨리고 가장 실속을 많이 챙긴 당신이라는 점에서 그렇소.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리까?”

아무리 몸에 배인 인내심이라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를 꽉 물은 채 자신도 모르게 손이 불안하게 탁자를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 친구의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또 다시 어렵게 얻은 자식마저 죽이는데 공모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더욱 역겹소. 더구나 동정오우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친구를 죽이고자 그 아들을 이용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계책을 생각해낸 그 교활한 머리를 지금 당장 빠개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이놈----!”

중의는 당장이라도 손을 쓸 태세였는데 결국 손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탁자 위에 팔을 올려놓은 능효봉의 자세가 공수를 겸비한 완벽한 자세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내심이 무너지면 그 뒤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다.

허나 중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또 다시 참았고, 그것은 중의가 무섭도록 자신의 감정에 엄격한 인물이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대신 그의 눈에서는 쇠라도 녹일 듯한 무서운 안광이 이글거리고 얼굴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그는 떨려나오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

“누구나 추구하는 바가 틀릴 뿐이다. 네가 가진 가치관과 지금 하고 있는 네 행동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아주 편리한 변명이구려. 그래서 그것도 모자라 친구는 죽었지만 살아남은 그 녀석에게 돌팔이 의원을 가장해 금제나 가해 놓은 것이오?”

능효봉도 전신에서 무서운 기세를 뿜어냈다. 기세에서 밀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상대에게 오판을 하게 만들면 종종 상대는 예상하지 못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고, 그것은 자신이 의도한 상황을 어떻게 뒤틀어놓을지 모르는 일이다.

능효봉은 중의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중의는 절대 함부로 손을 쓸 위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험한 욕을 해댄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없으면 참을 인물이 중의였다. 그의 신중함과 인내심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구할 이상의 완벽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 신중함과 인내심으로 인해 그는 언제나 동정오우의 맨 끝에 서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가장 많은 것을 차지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네놈에겐 오히려 바라던 일이 아니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네놈에겐 다시없는 호기가 되겠지… 그래서 이토록 자신 있게 모습을 보인 것일 테고….”

높였던 억양은 차츰 가라앉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긴장된 순간이었다. 기세와 기세가 허공에서 무섭게 부닥치고 있었다. 중의가 비록 무공에 있어서는 동정오우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동정오우 중 한 사람이었다. 한 순간만 방심을 하면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초절정고수였다.

“아니 어쩌면 이런 혼란스런 상황을 네놈이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말을 하다말고 중의는 뭔가 다른 생각이 뇌리에 스친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네놈이 부탁하려는 일이 그럼?”

“그렇소. 당신이 당신 친구의 아들에게 가해놓은 금제를 풀어달라는 것이 내가 말한 부탁이오.”

중의의 놀라움은 극에 달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이놈은 정말 이해불가한 놈이었다. 더구나 능글맞은 미소 뒤에 나오는 말은 중의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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