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50회

등록 2007.03.13 08:19수정 2007.03.13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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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잠입과 경신술에 뛰어난 일접도 보주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비록 지금은 속이 빈 강정의 입장일지라도 보주는 중원제일인이다. 그의 이목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의 이목을 속일 수 있다는 것과 같았다.

다만 이미 파악한 일접을 운중보에서 처리하지 않고 모가두로 하여금 뒤를 따르게 한 의도였다. 운중보에서 처리하지 않은 것은 자신을 아직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모가두로 하여금 타인의 이목을 피하여 일접을 죽이고자 했던 것일까?


@BRI@결론은 쉽지 않았다. 모가두가 환영교수를 죽였다면 뒤처리를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왜 그리 쉽게 환영교수를 죽인 흉수로 지목되게 만들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상만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좀 더 상대의 의도를 신중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백호각에 뛰어 든 자들은 바로 설중행과 능효봉이 맞겠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상만천이 불쑥 묻자 일접이 황급히 고개를 끄떡였다.

“복이 남긴 음호에서 보면 그들일 것이라 합니다.”

“으음… 설중행… 그 아이가 정말 보주의 자식일까? 상황으로 보면 가능성은 충분한데. 확실한 연관 고리가 없어. 보고 역시 물증 없이 추측만으로 작성된 것이야.”


전서로 전해진 보고 역시 뚜렷한 확증은 잡지 못했다. 다만 그럴 것이라 추측한 것뿐이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조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회에서는 그 당시부터 조사했어. 물론 화산의 매봉검(梅峯劍) 황용(黃蓉)과 관계를 가졌고, 그것이 자식을 얻기 위함이란 사실은 이미 보주가 운중보에 돌아오기 전에 알아낸 사실이야. 그래서 또 다른 황용이 없을까 철저하게 조사했지. 하지만 더 이상 관계를 가진 여자는 없었어.”

황용이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하고 그 아이가 보주의 씨였다는 사실은 유산이 되고 난 후에야 알았다. 그 사실은 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강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정오우에게 후예가 있는 것은 회에 걸림돌이었다. 특히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운중이나 성곤, 혈간에게 후예가 있는 것은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많았다. 부모의 마음이란 것은 맹목적이어서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카였지만 혈간이 옥기룡에게 보여준 맹목적인 아집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녀간의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법입니다. 더구나 이미 그 자의 모친으로 추정되는 아미의 회운사태(回雲師太)가 이곳에 들어와 있습니다.”

일접의 조심스런 말에 상만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 당시에 조사를 얼마나 철저하게 했는지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다. 두 사람 사이에 관계는 없었다. 보주가 아미에 갔을 때 단 이틀을 머물렀고, 회운사태를 만난 것이 단 두 번뿐이야. 전대 아미파의 장문인이 본 회 소속이었다.”

불가에 몸을 담고 있는 여승으로 사내를 받아들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아주 급박한 일이 있거나 생사존망의 경우와 같은 희귀한 일이 있다면 예외는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상만천이 이런 결론을 내는 것에는 그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다.

두 사람 만의 시간은 없었다. 아무리 조사해도 회운사태는 물론 그 외의 여자를 취할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조사되었고, 다른 여인 역시 특별히 조사된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보주와 회운사태 사이에는 남녀 간의 미묘한 관계는 아닐지라도 뭔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 졌다. 설중행이란 아이가 아미의 추천을 받아 운중보에 들어왔던 것 역시 회운사태의 고집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파악된 바였다.

그러나 남녀 간의 관계란 것이, 그리고 특히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그리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었다. 몇 년을 살아도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부도 많은데 설사 보주와 회운사태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배를 맞추었다 해도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여하튼 관계는 있어. 설중행이란 아이와 보주, 그리고 회운사태 그 세 사람 간에 말이야…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연결 고리가 필요해.”

상만천이 가진 탁월한 장점 중의 하나가 확실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는 신중함이었다. 남들이 모두 확신하고 있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납득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그 속에 스며있는 불확실함을 제거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근거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번이 그러했다. 모든 정황 증거로 보면 확실히 보주와 회운사태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설중행인 것 같았다. 허나 뚜렷한 근거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판단하고 그 결론에 꿰맞추다보니 그런 확신이 선 것일 뿐 실상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물증은 전혀 없었다. 더구나 회운사태가 아이를 가졌다면 아미파 내에서 모를 리 없었다.

공교롭게도 보주가 떠난 뒤 바로 회운사태가 폐관수련에 들어갔다고는 하나 그 또한 아미의 청정암(淸定庵)에서의 폐관수련이었으니 웬만하면 수발을 드는 사미승이라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아예 눈치 없는 사미승이라 헐렁한 승복으로 가린 탓에 배부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임산부의 특징은 나타나는 법. 더구나 아무리 독한 여자라 해도 아이를 낳으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 아닌가? 상만천이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일접은 더 이상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인은 언제나 저러했고, 자신은 따라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신 십여 년 간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언제나 주인의 판단이 옳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역시 옳을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은 주인의 판단이 옳음을 증명하는 물증을 조사해내는 일이다.

“최선을 다해 세 사람의 관계를 재차 조사하겠습니다.”

상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금포(錦袍)를 입어야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준비를 해놓도록….”

그 말에 표정의 변화가 없던 일접의 눈빛이 흔들리고 잠시 얼굴색이 변화를 일으켰다. 천하제일의 갑부가 금포를 입는 것이야 별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언제나 마의를 즐겨 입는 상만천에게 있어 금포를 입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

상만천은 금포를 입은 적이 별로 없었다. 천잠보의(天蠶寶衣)를 안에 받치고, 양 가슴에 용봉이 금박으로 수놓아진 금포는 언제나 똑같은 것을 준비하지만 한 번 입었던 금포를 다시 입은 적은 없었다. 아니 다시 입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옳았다.

상만천에게 금포는 전쟁을 앞둔 무장처럼 큰 위기가 닥칠 때 입는 옷이었다. 생사대적을 만났거나 목숨을 걸고 승부를 해야 할 때에만 입는 옷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났을 때 금포에는 그만한 흔적을 남겨졌고, 다시는 입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기에 금포는 일생을 통해 몇 번 입은 적이 없는 옷이었다. 자신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중대하고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입은 적이 없었다.

주인은 이번 사태가 그토록 위험하고 심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기야 중원을 호령하던 동정오우 중 두 명과 동창의 수뇌 중 하나였던 신태감마저 피살을 당한 상황이니 심각하다면 심각할 터였다. 그녀는 새삼스레 운중보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임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대답을 하고 주인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말이 없이 뭔가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쳤다.

“아… 그리고….”

그녀가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 상만천이 생각에서 깨어난 듯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다시 문을 닫고 다가오자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양수(斷陽手)가 백도에게 당해 백호각으로 내동댕이 처지는 순간 옥기룡에게 당한 설중행을 능효봉이 구해갔다고 했지?”

“아직 백호각에 침입한 자들이 그 두 사람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만 복이 남긴 내용에 의하면 아주 공교로운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맞아… 비영조에 속해 있었고, 이번 혈간을 기습한 것도 사실이고… 그들 동료를 구하려 뛰어든 것도 확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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