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53회

등록 2007.03.16 08:07수정 2007.03.16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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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하지만 방법을 찾고 나니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생각은 자네가 하란 말이네. 나는 내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자네가 생각하는 쪽으로 움직이겠다는 말이라네. 열쇠를 쥔 자가 누군지, 또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는 자네가 생각하고 그 열쇠를 가져오는 일은 내가 얼마든지 나서겠다는 말이네.”


@BRI@생각하고 추론하는 일은 무조건 함곡이 하고 자신은 몸으로 때우겠다는 말이다. 그것이 어쩌면 현명한 생각인지 몰랐다. 풍철한 역시 만만치 않은 경험과 판단 능력이 있어도 함곡을 따라가지는 못할 터였다.

“내 귀에는 아주 편하게 놀고먹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함곡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으며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없는 웃음 뒤에는 당혹스런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확실히 풍철한 다운 생각이고 방법이었다.

“머리를 쓰는 일은 어렵고, 몸으로 움직이는 일은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자네와 같이 머리에 먹물이 가득 찬 사람들뿐이네.”

“나 혼자 생각하고 추론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네. 자네가 도와주어도 어려운 판에 자네 혼자 시키는 일만 하겠다니 하는 말이네.”


“그래도 일단은 그래 보자는 말이네. 어차피 이틀간 내 머리를 짜내어 자네와 같이 생각해도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하여간 그 열쇠를 가진 인물들이 누군가? 내 그 자의 머리통을 부셔놓더라도 열쇠를 가져오겠네.”

함곡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허거리며 웃었다.


“자네 역시 열쇠를 가진 사람이네. 아직 그 열쇠를 사용할 문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자네 머리통이라도 부수려는가?”

농담이지만 풍철한은 함곡이 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미로에 갇혀 있는 것으로 비유했는지 완전히 이해했고, 그 비유가 너무나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들이 갇혀 있는 미로에는 그 문마다 맞는 열쇠를 가진 자가 따로 있었고, 지금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문의 열쇠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의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는가?”

그 물음에 함곡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풍철한이 따로 움직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쇄금도 윤석진이 가지고 있었네.”

“빌어먹을… 그는 죽었네. 그럼 그의 시체라도 뒤지란 말인가?”

풍철한의 툴툴거리는 말에 함곡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죽으면서 열쇠를 누군가에게 넘겼네. 바로 그 살인 현장에서 살인하는 것을 보고 있었던 자에게 말이네.”

“목격자가 있었단 말인가?”

“물론이네. 바로 서향(瑞香)이네. 자네도 현장에서 보았듯이 그 비밀통로에는 서향이 짙게 남아 있었네. 밀폐된 공간이라 냄새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매우 오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네.”

“서향의 주인이 범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나는 현장을 유심히 보았고, 비밀통로 역시 자세히 조사했네. 그 비밀통로에서 방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유일하게 족자 뒤에 있는 문뿐이네. 그렇다면 아무리 방사에 빠져있다 해도 윤석진이 모르고 있었을까? 윤석진과 진가려를 죽인 흉수는 이미 침상 밑에 있었네. 또한 서향의 주인이 어떠한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 비밀통로에 있었다네.”

풍철한은 고개를 끄떡였다.

“흉수의 방조자이든가. 아니면 윤석진이나 진가려를 몰래 찾아온 사람일 수도 있겠군.”

“그렇다네. 분명한 것은 그 서향의 주인이 살인현장을 보았을 것이란 사실이지.”

“서향의 임자는 다섯 명이라고 했네. 어제 그 두 자식이 조사를 했고… 추교학만 조사를 하지 못했다고 했던가?”

“궁수유도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네.”

“내가 두 사람을 조사하란 뜻이지?”

풍철한의 말에 함곡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뭔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아니네. 우리는 설소협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네. 궁수유는 설소협이 조사해야 할 것이네. 자네가 조사한다면 오히려 경각심만 가지게 해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네. 어제도 그래서 두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이라네. 다만 추교학이라면….”

그 때였다.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함곡의 말이 끊겼다.

“좌 선배인 모양이군.”

풍철한은 이미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누가 오는지 이미 감을 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아침에 현무각을 찾을 사람은 좌등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며 좌등이 모습을 보였다.

“편히 들 쉬셨소?”

편히 쉴 리가 있나? 아마 운중보 내에서 편히 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풍철한은 볼멘소리를 하려다가 좌등 역시 심기가 편하지는 않으리란 생각에 말을 바꾸었다.

“조반은 드셨소?”

좌등은 함곡과 풍철한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어제 과음들을 하신 모양이오. 아침부터 기운이 없어 보이니 말이오.”

보주에게서 술이 나왔으니 어제 술을 마셨다는 것쯤은 알고 인사치례로 던진 말 같았지만 듣는 함곡과 풍철한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좌등이 아침에 온 것은 새로운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닐까 해서였고, 한편으로는 일을 벌인 두 사람의 소식을 좌등의 입을 통해 혹시 전해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쨌든 무지하게 궁금했다.

“오늘은 또 얼마나 귀찮게 만드시려고 이른 시각에 오신 것이오?”

풍철한이 투덜거리듯 말을 한 것이지만 함곡은 내심 감탄했다. 역시 풍철한이었다. 두 사람에 대한 소식이 매우 궁금했지만 직접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지 않고 오히려 어제 새벽부터 찾아와 귀찮게 만든 것을 빗대어 좌등으로 하여금 어젯밤에 일어난 사건을 모두 털어놓게 만드는 것이다.

“이른 시각이라니? 어제는 부득이 새벽부터 깨워 조반도 드시지 못하게 해 뭐라 드릴 말이 없지만 지금은 벌써 진시(辰時)가 넘었소.”

“하여간 또 귀찮게 만들려 오신 것 아니오?”

“하하… 풍형이 불만이 많으신 모양이오. 오늘은 뭐 그리 귀찮게 해드릴 일은 없을 것 같소. 어제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났지만 공식적으로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오.”

그 말에 풍철한이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간단하게 사건은 일어났지만 풍형을 귀찮게 할 일은 없다는 뜻이오.”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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