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63회

등록 2007.03.30 08:33수정 2007.03.3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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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른다는 명성과는 다르게 추산관 태감은 아주 여리게 보이는 잘생긴 인물이었다. 이목구비가 둥글고 반듯한 것이 오십 중반의 나이로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동안(童顔)이었다.


체구도 보통 사람보다 약간 작은 듯 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어서 실제보다 더 왜소해 보이고 연약해 보였다. 저런 인물이 수만 명에 달하는 지방의 학유(學諭)나 동림당원, 그리고 위충현의 득세에 반대하는 공신들을 숙청하는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자네는…."

목소리 역시 약간 고음이 섞여있어 듣는 이에게 묵직함이나 위압감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경후는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더욱 조아렸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사람들은 때때로 외모나 풍기는 기품, 목소리 등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나이가 든 사람일 경우에는 그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대개 적중할 확률도 높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외모나 기품으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천하를 가진 사람이라도 의외로 나약해 보일 수 있고, 훌륭한 사기꾼은 그런 것까지 교묘하게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외모나 기품은 첫인상을 좌우하기도 하지만 상대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무기도 되는 것이다.


"자네는 처음으로 본관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는군."

경후에게 사흘 동안에 일어난 운중보의 모든 사건과 정황을 보고받은 후에 뱉은 첫마디였다. 경후의 몸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용… 용서를… 비직(卑職)이 무능하여 태감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겨우 들릴 듯 말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그 역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추산관 태감의 좌우에는 세 명의 인물들이 시립해 있다. 특이할 것 없이 보이는 유생(儒生) 차림의 인물들이었지만 문무를 겸비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라 불리는 무섭고도 뛰어난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다.

추산관 태감의 말 한 마디, 아니 눈짓 하나로 자신의 목숨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추산관 태감을 보필하여온 경후는 지금 추태감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느낄 수 있었고, 외모와는 달리 얼마나 잔혹해 질 수 있는지도 아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지금은 자신의 생사를 가르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용서해 주시지요. 아버님. 경첩 형께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추교학이 나서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 말은 듣지 않아도 자식인 추교학의 말이라면 의외로 모두 들어주는 사람이 바로 추산관 태감이었다.

"이곳은 무림입니다. 황실과는 많이 다르지요. 번역 정도의 인물 몇 가지고는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무림에서의 법칙은 곧 힘이다. 법이나 규칙 따윈 주먹 다음이다. 더구나 동창의 최고고수라 생각했던 신 태감마저 당한 상황이다. 그것을 생각하지 못할 추 태감이 아니다. 허나 그가 화를 내는 원인은 다른 것이었다.

"서교민이 죽었어. 천과(天荂).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내의 명호에 꽃을 의미하는 과(荂) 자를 붙이는 일은 흔치 않다. 추산관 태감의 물음에 우측에 있던 유생차림의 사내가 예를 취함과 동시에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황으로 보아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토설하고 죽었다고 보입니다. 운중보주 역시 이제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천지인 삼재 중 천에 해당하는 해사한 얼굴에 맑은 눈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마가 좁고 광대뼈가 약간 나왔기는 하나 피부가 희어서인지 나름대로 유생의 기품이 풍기고 있었다.

"백선(栢蘚)이 구룡의 무공에 처참하게 당했다. 그 의미는?"

백선(栢蘚)이란 추산관 태감을 비롯한 몇 명만이 사용하는 신 태감의 호(號)다. 재차 묻는 추 태감의 질문에 천과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철담의 죽음도 그렇지만 이제 정면으로 회에 도전하겠다는 선전포고입니다."

천과의 대답은 매우 간략했다. 많은 설명을 생략하고 있지만, 간단명료해서 그 말에 포함된 다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결국 운중이란 말인가?"

"보주는 무공에 있어 매우 특이한 재질을 가진 인물이라고 들었습니다. 구룡의 무학은 익히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을 익히는 데는 반드시 구룡이나 보주와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너무 뚜렷하게 운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게 오히려 꺼림칙해. 그만큼 자신 있다는 것인가?"

천과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신 태감을 죽인 이유가 바로 제독(提督)을 이 운중보에 불러들이기 위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후훗… 이 안에 불러들여 한꺼번에 처리하자는 속셈이란 말이지? 그럴지도 모르지. 본관이 들어옴으로 해서 이제 다 들어온 셈이 되었나?"

그 점에 대해서는 운중보 행을 결정하기 전에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허나 그것이 분명하다 해도 추산관 태감은 운중보 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흉수가 노리고 있듯 자신 역시 이번 기회에 목적한 바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 역시 자신이 목적한 바를 더 이상 늦추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준비하고 기다릴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흉수가 노리는 목적은 달라도 방법은 자신이 원하는 바였고, 차라리 이런 상황과 기회를 만들어 준 흉수에게 감사라도 하고픈 마음이었다.

"헌데… 비영조 조장 두 놈이 멀쩡하게 이 안에 들어와 있다고 했지?"

추산관 태감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조아리고 있는 경후를 바라보았다.

"그… 그렇습니다. 지금 함곡의 일행으로 현무각에 머물고 있습니다."

"무능한 작자! 그래 그 두 놈조차 여기에 붙들어 놓지 못하고 함곡에게 빼앗겼단 말이냐? 거기에다 서교민과 백선의 죽음에 가장 혐의가 짙은 홍교란 년도 빼앗기고?"

추산관 태감의 말에 노기가 짙게 묻어나왔다. 경후의 목이 저절로 더 움츠려 들었다. 뭐라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경후는 꾹 참았다.

사실 그 점에 있어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경후도 그런 상황이었지만 추교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중보의 총관이라 할 수 있는 좌등이 와서 다른 시비를 넣어주고 홍교를 빼내가는 데야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더구나 추산관 태감이 들어온다는 전갈을 받고 나서는 모든 것을 추산관 태감이 들어온 뒤에 처리할 생각이었으니 미리 손을 쓰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설명할 계제가 아니었다. 이런 때는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옳은 일이다. 자칫 변명이라도 하려 들다가 오히려 추산관 태감의 화를 돋우게 되면 정말 다시는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아버님께서 오시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추교학의 말은 아주 적절한 것이어서 처음으로 추산관 태감의 얼굴이 다소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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