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64회

등록 2007.04.02 08:21수정 2007.04.02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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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은 그 누구의 아부보다도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그 놈들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뒤처리를 위해 보냈던 태번(兌幡)의 종적이 사라져 일이 틀어졌다는 예상은 했지만…."


태번은 팔번(八幡) 중 한 인물. 이번에 같이 동행한 팔번 중 태번만 같이 오지 못했다.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철기문의 구천각 인물들에게 당했을까? 아니면 그 두 놈들에게 당했을까? 어떠한 것도 가능성은 낮았다. 그 정도로 팔번에 대한 추태감의 믿음은 컸다.

허나 두 놈이 멀쩡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추산관 태감에게 있어서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운중보에 들어와 취했다던 두 놈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허나 추태감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놈들을 요긴하게 써먹을 수도 있을 테니까…."

병법에 있어 최선책은 자신이 나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내 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으로 상대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이다.

함곡을 회유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황에 따라 슬쩍 그들이 비영조의 조장이고 혈간을 시해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옥청문에게 흘리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동창에 속해 있었던 놈들이었지만 혈간의 시해에는 전혀 간여하지 않았다고 시침을 떼면 그만이었다.


눈치를 채더라도 옥청문은 대놓고 따지지는 못할 것이고, 대신 그 두 놈에게 화풀이 하는 것으로 그만일 터였다. 그리고는 적당한 선에서 여러 가지 이권을 쥐어주면 끝날 것이고, 그 두 놈뿐 아니라 함곡 일행과 피 튀기는 싸움을 지켜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방해물을 제거해 나가면 된다.

"자네들 셋은 한 가지도 놓치지 말고 세밀하게 상황을 파악해 놓도록‥ 그리고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봐."


추산관 태감의 내심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삼재다. 추산관 태감의 지시는 사태를 확실히 파악해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라는 것이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면 피아가 분명해 진다. 이용할 수 있는 자와 제거할 자가 구분된다. 어느 시기에 누구를 이용할 것이지도 확연해진다.

"심려 놓으시길… 오늘 중으로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모든 것을 같이 해온 듯 세 사람의 대답이었지만 한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이 똑같았다. 추태감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더니 문득 경후를 향해 엄중한 목소리를 발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 허나 앞으로 조그만 실수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야."

전전긍긍하던 경후는 속으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기의 순간이 지나갔다.

"하해(河海)와 같은 태감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아부를 하는 것도 그 시기가 있는 법이다. 추태감의 성격을 이미 꿰뚫고 있는 경후도 그 시기가 언제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본관이 직접 이 안의 사정을 먼저 알아보아야겠어. 오늘 중으로 모두 만나보는 게 먼저겠지. 여러 작자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어보면 전체적인 윤곽이 잡힐 거야."

경후가 얼른 대답했다.

"이름만 호명하시면 모두 전갈해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릴 것 없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불러. 무당의 장문이 들어와 있다고 했지? 도대체 그 자는 뭐하고 있었던 것이야? 소림에서도 각원인가 하는 늙은이가 들어와 있다며? 화산의 놈들이야 지들 꿍꿍이를 감추고 있다지만 도대체 이 안에 있는 교두 놈들마저 왜 숨죽이고 있는 것이야? 자네마저 벌벌 떨며 고개를 처박고 있고…."

무당과 동창의 관계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한 식구나 같은 처지였다. 그런 그들이 숨죽이고 지켜만 보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조심스럽게 경후가 추산관 태감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모든 것은 철담이 시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의 모든 일은 철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심점(求心點)이 사라지자 모두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는 듯 보입니다."

비록 당황하고 있었다지만 상황을 보는 경후의 눈은 정확했다. 회의 입장에서 운중보 내 뿐 아니라 무림의 모든 일을 관장하던 인물은 철담이었다. 운중보 내의 회의 전력이나 관계된 무림세력을 취합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철담이 살해당하자 각기 따로 움직이게 되고 당황하는 오합지졸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철담의 흉수가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겠지."

당연한 결론이었다. 철담의 죽음은 회의 전력의 삼분지 일 정도의 소실로 그치지 않았다. 세 개의 다리 중에 하나가 사라지면 그 솥(鼎)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것이다. 설사 서 있다 하더라도 툭 건들면 쓰러져 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철담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보냈던 신태감마저 살해된 것은 흉수의 목적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상만천… 이 자식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고… 제 놈이 아무리 딴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도 기껏 장사꾼 주제에…? 시기를 봐서 정리해야겠어."

최근 들어 안 사실이지만 어차피 상만천은 자신과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은근히 마음을 떠보았지만 상만천의 욕심은 자신과 다를 바 없었다. 일개 상인 주제에 제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어차피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이 들면 일찌감치 제거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다.

오히려 철담의 죽음은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회는 한 사람의 손에 장악되어야 할 시기다. 회주가 셋이라는 것은 의외로 장점이 많았다. 거대한 회의 조직을 각자 맡은 부분에 한하여 전문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점 뿐 아니라 확실하게 회의 이름 아래 중원 전체를 장악할 수 있고, 서로 보완을 할 수 있어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이었다.

허나 그것은 강력한 상대가 있을 때 유용한 제도였다. 이루어야 할 목적이 뚜렷할 때 보이는 장점이었다. 상대가 사라지고 모든 것을 움켜쥐었을 때에는 오히려 머리가 셋이라는 사실이 큰 장해물이 되는 것이다.

"헌데 도대체 중의는 어디에 있는 거야? 중의마저 뭔 변을 당한 것 아니야?"

추산관 태감의 불안의 시작은 바로 중의였다. 중의는 추산관 태감에게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누구보다 유력한 조력자였고 동료였다.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어떠한 정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 연락이 없어…!"

추산관 태감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경후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고 알 도리도 없다. 당황하고 있는 경후를 모면케 한 것은 하종호의 목소리였다.

"성곤께서 오셨습니다."

성곤과 만난 것은 오늘 운중과 같이 마중 나온 것을 포함해 몇 번 되지 않는다. 또한 개인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을 가장 먼저 찾아왔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성곤이…? 곰 같은 작자가 눈치 하나는 빠르군."

인사 치레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성곤의 방문을 추태감은 그렇게 치부했다.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경후가 또 다시 내심 숨을 몰아쉬며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안으로 모시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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