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65회

등록 2007.04.03 08:06수정 2007.04.03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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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지는 알아. 하지만 나로서는 말해주기 곤란해."


궁수유는 사랑을 가득담은 눈길로 설중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중행이 찾아 온 목적이 자신과의 개인적인 일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묻지도 않은 대답을 먼저 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가려란 여인의 방에 딸려있는 비밀통로에서 풍기던 서향의 주인은 누님이 맞소?"

더 이상 묻지 않기를 바랐건만 입장이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모든 것을 말해주어야 할 터였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입을 열지 않았다.

"맞소? 아니오?"

이미 알고 왔다는 듯 그의 말에는 확신이 서려있었다. 그로서는 어쩔 수없이 추궁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본의든 아니든 간에 일단 함곡과 풍철한은 자신의 어깨 위에 조사의 막중한 책임을 맡겨놓은 상태였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두 자루의 용봉쌍비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어떻게 그게?"

궁수유는 꽤 놀라는 표정이었다. 저 두 자루는 운중보 주인의 신물이다. 그녀 역시 저것을 손에 쥐어보았으면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꿈을 접은 지 세월이 꽤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아쉬움은 남아 있었고, 그녀의 눈에 떠오른 것은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물론 저것을 사부가 조사를 맡긴 함곡과 풍철한에게 준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설중행이 가지고 있음은 그들을 대신해 조사하러 왔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는 더 이상 물지 않고 말끝을 흐린 것이다.

"……!"

설중행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궁수유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궁수유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태세였다. 궁수유는 지금 서로의 입장이 애정을 주고받는 남녀관계가 아닌 만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설중행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조사하는 입장에서 온 것이다.

"후아…."

궁수유는 탄식을 불어냈다. 그녀의 달콤한 입김은 옆에 앉은 설중행의 귓바퀴를 맴돌다 사라졌다.

"꼭 알아야만 해?"

"……!"

설중행은 고개만 끄떡였다. 자칫 다른 말이나 여지를 주게 되면 조사는 끝이다. 그 역시 사내인 만큼 궁수유의 규방에 단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은근히 안고 싶다는 욕정이 일고 있었다. 어차피 살을 맞댄 사이는 언제나 그렇다.

"그래… 그 비밀통로에 있었어. 하지만 왜 거기에 가 있었는지는 묻지 마. 대답하기 싫어."

그것만큼은 정말 말을 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설중행에게 여자끼리 그 동안 관계를 나누었다고 하는 말은 죽기보다 싫은 말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이유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설중행은 궁금했지만 궁수유의 태도로 보아 절대 말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비껴나가기로 작정했다.

"좋소. 거기에 간 이유가 무엇이든 사건과 관계가 없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소. 다만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누님은 쇄금도를 죽인 흉수가 아니오."

"물론 아니야."

"하지만 살해현장을 본 목격자요."

그 말에 궁수유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중행과 밀어를 나누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런 대화를 하기 싫었다. 더구나 설중행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될 진가려와의 관계가 밝혀지는 날엔 설중행과의 사이가 끝장날 것이라 생각하는 터였다.

"보지 못했어. 물론 소리는 들었지. 두 남녀의 신음소리가 고조되는 순간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마지막 숨소리…."

그녀의 귀에 언뜻 그 안에서 두 남녀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마지막 비명이 들리는 듯 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에는 그와 함께 마주 보고 있던 사내의 입가에서 웃음으로 생각되던 얼굴 근육의 움직임과 간단하게 턱짓으로 궁수유부터 나가라고 했던 그 사내의 모습도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 흉수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시는 거요?"

설중행의 다그침에 궁수유는 또 다시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모두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고, 지금의 상황에서는 자칫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발설을 하면 상대는 자신의 더러움과 추악함을 마주보고 있는 이 어린 연인에게 모두 말해버릴 것이고. 이 사람은 영원히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에 그녀는 사실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보지 못했으니까…."

"그곳에 있었으면서… 그리고 쇄금도와 진가려란 여인이 누군가에게 피살당한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 보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오?"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여자가. 더구나 운중보주의 제자인 궁수유가 그냥 지나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궁수유 역시 설중행의 당연한 지적에 더 이상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설중행은 그녀에게 말 못할 다른 사정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의 입을 막고 있는 것일까?

"……!"

대답이 없었다. 설중행 역시 더 이상 추궁을 하지 않고 그냥 궁수유를 지켜보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 궁수유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제 이 운중보가 싫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싫어. 해운… 너를 다시 만나고 나서야 내 마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았어. 사부님의 회갑연이 끝나면 나는 이곳을 나갈 거야."

자신이 싫었을 것이다. 이 안에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잊고 싶을 것이다. 마치 내팽개치듯 살았던 삶이 설중행을 다시 만난 그 때부터 썩어가는 시신처럼 음습하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추악한 삶처럼 생각되었을 것이다.

"어머님을 이곳에 오시라 한 것은 내가 사부님의 후계를 잇고자 한 것이 아니라 무사히 이곳을 나가고 싶어서였어."

설중행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사히 이곳을 나가기 위해서라는 말은 그녀가 지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보주의 제자인 그녀도 그만큼 위험에 처해있는 것일까?

"내 바람이 있다면 너 역시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갔으면 하는 거야. 나와 함께라면 더욱 좋고… 그래서 나는 네가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해."

제대로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도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일까? 더 이상 대답을 강요할 수 없었다. 강요한다면 궁수유의 목숨을 자신이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잠시 측은한 눈빛으로 궁수유를 바라보던 설중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갈 거야?"

궁수유가 같이 몸을 일으키며 다급하게 물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같이 있고 싶은 것이 궁수유의 마음이었다. 설중행은 고개를 끄떡였다.

"시간이 나면 다시 오겠소."

"그래… 언제든지 와."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는 설중행이 고마웠다. 그럴수록 말을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문 쪽으로 걸어가다 뒤를 한 번 돌아보는 설중행의 시선에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달려가 설중행의 품에 안겼다.

'그 비밀통로 안에는 나 말고 또 한 사람이 있었어. 그는 내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었고, 쇄금도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자 그는 나에게 그곳에서 나갈 것을 강요했어. 흉수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와 한 패일거야.'

그녀는 설중행의 품에 안긴 채 전음을 보냈다.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설중행 역시 그녀를 힘주어 안으며 물었다.

'그가 누구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잠시 알리지 않았으면 해… 그는….'

그녀가 알려 준 그는 설중행도 아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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