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만큼 분노만큼 농부의 주름은 깊게 패였다

[내가 만난 그림, 내가 만난 세상 ①] 국회는 그들을 구해야 한다

등록 2007.04.05 22:22수정 2007.04.06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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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1990년의 가을>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150 x 146 cm, 1990년 ⓒ 이종구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당시 30대 청년이던 이종구 화백은 이런 선언을 했습니다. '농토와 농민들의 삶을 밝혀내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그는 그 언약대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해서 농촌과 농민의 삶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을 발표해왔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민주화는 이루어졌고, 많은 민중화가들 또한 저항의 깃발을 내렸지만, 그는 여태 깃발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민주화는 대동세상, 국민 모두가 잘 사는 그런 세상이어야 함에도 농민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는 그의 고집이 옳았다는 것이 이번 FTA 협상타결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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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의 가을> 부분 ⓒ 이종구

그의 그림을 봅시다. 농부의 표정에서 피곤함보다는 체념과 근심이 느껴집니다. 아니, 슬픔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농부의 머리 위에 보이는 미국 국적의 비행기를 보면 분노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농부의 얼굴에서는 분노를 찾을 수 없습니다. 힘이 없으니 분노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분노 뒤의 체념일까요? 농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만 피울 뿐입니다.

그는 가슴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도시 것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겄냐?" 아니, "힘 없는 우리가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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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추락> 나무틀에 흙, 종이죽, 30 x 90 cm, 1986년 ⓒ 이종구

작품의 명제가 '추락'입니다. 오렌지를 너무 많이 실어서일까요? 아니면 계획된 불시착일까요? 비행기는 제주도 밀감밭을 초토화시키면서 이 땅에 내립니다. 20년 전 작품이지만, 지금의 상황과 딱 들어맞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화가가 점쟁이도 아닌데, 어떻게 20년 후의 일을 예견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화가에게 예언적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농촌이 20년 전부터 우루과이 라운드니 시장개방이니 해서 외국산 농산물에 의해 초토화되고 황폐화 돼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지금의 현실을 '예언' 한 그림이 아니라 20년 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고, 힘없는 농민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당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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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오지리 김씨2> 부대에 유채, 75 x 110 cm, 1986년 ⓒ 이종구

당하는 것은 농사짓는 농민뿐 아니라, 소를 기르는 축산농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그림은 20년 전, 수입소 때문에 소값이 180만원에서 50만원으로 떨어질 때 그린 작품인데, 그 때 농부의 표정과 지금의 농부 표정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농부의 표정에서도 분노보다는 어이없는 허탈감이 짙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화낼 줄 모르고 순박하게 살아온 농민들이기게, 그들은 늘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이 땅의 농부들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짓밟히고 또 짓밟히면서, 농사 짓고 소 키우는 게 천직이기에 슬픔을 삭이며 20년을 버텨왔지만, 이제는 정말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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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투사> 한지에 아크릴릭, 85 x 64 cm, 1996년 ⓒ 이종구

입에 거품을 물고 이마에서 피가 나도록 수입 소들과 힘들게 싸운 황소의 눈빛에서도 슬픔이 느껴집니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수천 수만의 미국 소들을 바라보며, 이제는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다는 듯한 그런 눈빛입니다. 당장 어제부터 소값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현실을 알고 있다는 듯, 커다란 눈을 부릅뜬 채 앞날을 걱정하는 우리의 슬픈 황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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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고부에서 여의도까지>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200 x 104 cm, 1989년 ⓒ 이종구

순박하고 착한 농민들이지만, 그대로 당한 것만은 아닙니다. 소를 앞세우고, 쌀을 지게에 짊어지고, 국회의원들이 있는 여의도에 가서 함성도 지르고 눈물도 흘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무력감은 화가 역시 느꼈습니다.

"내가 농촌을 그리기 시작했던 10년 전의 그 때보다도 지금의 농촌은 한층 열악해졌고 더욱 황폐화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내 그림의 꿈이 농촌의 희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로 되어 버렸다. 미술의 사회적 기능과 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내가 작업해 온 결과가 오직 문화적 가치로서 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새삼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나마 내가 아직까지 그려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려 갈 세계란 오직 땅의 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일 수밖에 없다."
- '가나미술상' 수상소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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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복 <친구> 목판, 36 x 18.5 cm, 1987년 ⓒ 류연복

이 작품은 류연복 화백이 20년 전에 만든 판화입니다. 당시에는 민주화를 외치며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몸을 살랐는데, 이번에는 반FTA를 외치며 한 분이 분신하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언제나 이 땅에서는 이렇게 목숨을 던지며까지 반대할 일이 생기지 않을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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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수몰지의 마지막 여름>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콜라주, 150 x 200 cm, 1991년 ⓒ 이종구

이제 많은 농민들은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합니다. 농토가 물에 잠기기 때문에 떠나야 했듯, 멀쩡한 농토가 있음에도 미국 농산물이 값싸게 들어오니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합니다. 평생 농사 밖에 몰랐던 농민들이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난감하지만, 그래도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눈뜬 채 코 베이는' 도시에 가서, 몇푼 받은 보상금을 어떻게 지키고 뭘해서 먹고 살지 막막하기에, 농부의 아내는 손에서 호미를 놓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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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지의 마지막 여름> 부분 ⓒ 이종구

참으로 처연한 표정입니다. 우리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슬픈 표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통과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리얼리즘 미술의 '위대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정을 그려내기 위해, 화가는 그 고통을 깊이 공감해야 합니다. 그 고통에 같이 빠져들지 않고서는 이런 깊은 슬픔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표정과 표현을 통해 우리는 절실하게 실감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세상, 아니 '도시 것들'이기에 알 수 없었던 그 슬픔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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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메조틴트(동판화) 40 x 60cm 1996년 ⓒ 김승연

이 작품은 김승연 화백의 '야경 연작'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국회의사당 지붕 위에 불을 밝힘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국회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낮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고, 밤에 불을 밝혀야 겨우 보이는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회는 매일 싸움만 하고, 국회의원들은 무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국회이지만, 이제 농민들이 기댈 곳은 국회 밖에 없습니다. 물론 현재 국회의원 구성으로 볼 때 FTA 협정이 비준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진보적 국회의원들, 아니 반FTA를 외쳤던 국회의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 농민을 위하고, 이번 FTA로 피해보는 계층을 위한다면, 그들은 보좌관들과 함께 밤을 새우면서 서류를 검토하고 구제책이 담긴 법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몇 달 동안만이라도 지붕에만 불이 밝혀진 국회의사당이 아니라, 모든 사무실에도 불이 밝혀지는 국회의사당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보적 국회의원들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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