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68회

등록 2007.04.06 09:20수정 2007.04.0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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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뒤를 이어 진청운과 호조수(虎爪手) 곽정흠(郭晸歆)이 따라 모습을 나타내더니 그의 좌우로 섰다. 금방이라도 터질듯했던 팽팽한 긴장감이 허무하게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광나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이 지체되자 예상대로 방해자가 나타난 것이다. 운중보는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다. 더구나 격한 파열음과 고함소리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데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하필이면 좌등이라니… 좌등이 나타난 이상 승부를 보기란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다. 그는 갑자기 화가 치솟았다.


'보주의… 충실한 개!'

어제 교두 중 반일봉이 죽은 것이야 그렇다 치고 마궁효가 백도에게 피 곤죽이 될 때에는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지금은 어찌 이리도 빠르게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오?"

광나한의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흘러나왔다. 좌등에 대한 불만도 있었지만 모처럼 찾아온 승부를 방해한 것에 대해 더 화가 났다.

"보 내에서 사사로이 비무를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수석교두가 모를 리는 없을 터이고… 내가 무엇을 모른단 말인가?"


좌등은 떡 버티고 서서 아랫사람을 꾸짖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광나한의 심기를 긁어놓고 있었다. 무림의 선배임은 분명하나 언제부터 좌등이 보 내에서 저리 당당하고 큰소리를 쳤던가? 철담 어른이 살아계실 적만 해도 총관 직이라 하나 좌등은 그저 보주의 사사로운 일이나 처리하는 집사(執事)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철담 어른이 죽자 갑자기 운중보 내의 대소사를 모두 관장하려는 좌등의 태도가 못마땅하던 차에 자신의 앞에서까지 웃어른 행세를 하자 더욱 기분이 나쁜 것이다.


"어젯밤 마교두가 백도 놈에게 죽지 않을 만큼 맞았소. 알고 계시오?"

"아침에 삼수검(三手劍)으로부터 보고를 받아서 알고 있네."

삼수검은 호조수 곽정흠과 함께 보 내의 경비를 책임지는 엽락명을 말한다. 그 말에 광나한은 더욱 속이 뒤틀렸다. 물론 패를 가르다는 것 자체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분명 철담 어른이 살아계실 적에는 보주를 중심으로 한 몇 명의 인물을 제외하고 모두 철담 어른을 따랐고, 엽락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쉽게 철담 어른과 운중보주의 명령이 다를 경우에는 분명 철담 어른의 명령을 따를 사람이었다.

헌데 엽락명 마저 철담 어른이 죽자 좌등에게 일일이 보고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맡은 직책이 그렇다보니 분명 누군가에게는 보고를 해야 할 것이었지만 좌등이 아니라 직접 보주에게 보고를 했다면 차라리 이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또 어젯밤 모가두가 반교두를 살해한 사실은 알고 계시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보고받은 바 없네."

그 말에 좌등이 약간 놀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과 함께 모가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확인을 하는 모습이었는데 모가두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갑자기 교두들과 함께 나타나 무시무시한 나한권(羅漢拳)으로 나를 때려죽이려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소? 빌어먹을…."

시선을 광나한으로 돌리는 모가두는 정말 시침을 뚝 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좌등이 침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젯밤 반교두가 죽었단 말인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왜 보고를 하지 않았는가?"

묻는 것 같았지만 이것은 추궁이었다. 그러자 광나한은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속으로야 '그럼 당신에게 보고해야 옳았단 말이오?' 하고 싶었지만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실인 모양이군. 그럼 여기 와룡장이 반교두를 죽였다는 물증이나 증인이 있는가?"

좌등이 재차 다그치자 광나한은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지만 꾹 참으며 입을 열었다.

"물증이야… 반교두의 시신에 난 심인검의 흔적을 보면 분명하고… 증인은…."

광나한은 아차 싶었다. 증인이 어디 있는가? 아침에 만난 일접의 말로는 모가두가 자신을 뒤쫓은 것 같고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그곳을 떠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접을 끌어들이자니 일접이 운중각을 염탐했다는 사실까지 발각될 것 같자 말문을 닫은 것이다.

"없는 것인가?"

"없소."

"그렇다면 반교두의 시신에 난 심인검의 흔적이 와룡장의 것이라고 어찌 확신하는 것인가? 더구나 왜 시신을 자네 마음대로 현장에서 치워버린 것인가? 보 내에서 사건이 일어났으면 보 안의 규율대로 처리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말이네."

좌등 역시 약간은 기분이 상한 듯 했다. 그의 음성에 심하게 책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광나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세상이 변했다. 철담 어른이 모든 것을 주관했다. 그것에 한몫 거든 것이 교두들이었고, 광나한이었다.

"지금까지 보 안의 규율은 철담 어른에 의해 집행되었소."

헌데 철담 어른이 죽자 이제 보주의 실세들이 득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변화를 광나한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철담 어른을 대신하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광나한이 인내하며 백도를 끌어들이려 노력했던 이유가 바로 이 명분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 내의 규율이란 대개 회의 율법(律法)이었을 뿐 냉정하게 말하면 보 자체의 규율은 없었소."

광나한의 말에 오히려 놀란 인물들은 같이 동행한 교두들이었다. 이렇듯 강경하게 나올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들이었다. 모가두의 얼굴에 잠시 분노의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당장이라도 손을 쓰고 싶었지만 모가두는 분노를 속으로 억눌렀다. 좌등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지금 자네는 운중보 자체를 부인하는 것인가?"

좌등의 날카로운 지적에 광나한은 내심 꺼림칙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위험한 언동이었다. 허나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물러설 데가 없다. 지금 기세에 밀리면 앞으로 좌등을 비롯한 보주의 실세들 틈에서 고개를 처박고 지내야 한다.

"이름뿐인 운중보였소. 지금까지 운중보의 대소사는 모두 회에서 주관하지 않았소? 철담 어른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지금 좌 선배께서 좌지우지하겠다는 것이오?"

감히 회를 무시하겠느냐는 충동질이었다. 좌등의 눈에 노기가 서리고 얼굴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광나한의 태도는 명백했다. 운중보 입장에서 보면 항명이다.

"좋아.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묻지. 자네는 운중보 소속인가? 아니면 회 소속인가?"

좌등은 노기를 누르며 물었다. 다시 한 번 광나한의 태도를 분명히 확인하고자 함이다.

"본 교두는 운중보 소속이기도 하고, 회 소속이기도 하오. 운중보가 곧 회의 일부이기 때문이오."

철담이 죽고 난 이후로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운중보의 실세였던 철담의 측근과 이름뿐이었지만 운중보의 주인인 운중보주의 측근들 간의 대립이었고, 이것은 앞으로의 운중보를 누가 장악하느냐의 싸움이기도 했다. 측근들 중 무위나 명망으로 보아 가장 선두에 있는 좌등과 광나한은 그것을 결정하는데 아주 적절한 상대였다.

"자네는 운중보의 주인이 누구라 생각하는가? 보주인가? 아니면 회인가?"

분명 명색은 보주의 호를 따서 건립되었으니 당연히 보주였다. 또한 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대답은 한 가지일 것이다. 허나 실제로 지금까지는 회의 일부분이었다. 광나한은 생각은 확고했다.

"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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