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69회

등록 2007.04.09 08:17수정 2007.04.09 08:17
0
원고료로 응원
좌등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럼 자네는 운중보를 떠나야겠군. 운중보는 보주의 것이다. 그것은 운중보가 세워진 이래 변함이 없다. 보주께서는 번거로운 일이 싫어 철담 어른께 맡겨 놓았던 것일 뿐… 나는 지금부터 자네나 자네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운중보에 머물지 못하게 할 것이야."


광나한은 코웃음 쳤다. 좌등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흣… 재미있구려. 호랑이 없는 산에 토끼가 왕이라더니… 이제 철담 어른이 돌아가시니까 좌 선배가 주인노릇을 하려는 것이오?"

"나는 보주를 위해 존재한다. 주인이 누군가에게 운중보의 관리를 맡기셨다면 나는 그 사람이 제대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그만이었다. 허나 일을 맡은 사람이 사라졌다면 나는 주인을 위해 그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불만이라면 평지풍파 일으키지 않고 나가는 것이 좋다."

좌등의 기세는 누그러질 줄 몰랐다. 아예 작정을 하고 나타난 듯 했다. 아니 어쩌면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광나한은 내심 당황했다. 자신 역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나서기는 했지만 좌등이 저렇게 강경하게 나올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좌등은 온화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보주의 뜻이오?"


예봉을 피하고 한 번쯤 떠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해 던진 질문이었다. 허나 좌등은 더욱 단호했다.

"나가겠는가? 아니면 운중보의 규율에 따르겠는가만 결정하게."


좌등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문제는 광나한에게 어느 것도 선택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광나한의 시선이 좌등의 시선과 엉켜들며 불꽃을 튀기는 듯 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몇 차례의 변화를 보였는데 그 마지막은 비웃는 듯한 미소였다.

"후후… 어쩔 수 없구려. 본 교두가 좌 선배께 숭무지례(崇武之禮)를 청해도 되겠소?"

지켜보던 두 교두들의 얼굴색이 또 한 번 홱 변했다. 일이 커져도 보통 커진 것이 아니다. 아예 정면대결을 선포한 셈이다. 사실 숭무지례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숭무지례란 본래 교두들 사이에 있었던 관행이었다. 교두들을 선발하고 보충을 하는 과정에서 교두들 간 서열을 정하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 바로 숭무지례였다.

서열을 정하는 데에 있어서 기준은 어쩔 수 없이 나이라든가 강호에서의 명성 그리고 운중보의 입보 년한이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무림인들 사이에 있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강호에서의 명성이었고 운중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허나 강호에서의 명성이라는 것이 때로는 과대평가되거나 과소평가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불가피하게 교두들 간 불만이 싹트고 다툼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분쟁의 당사자 중에 누군가가 잘못을 했거나 객관적으로 잘못이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수석교두가 판단을 내리고 그에 대한 처분을 내리기 때문에 아무리 숭무지례를 청한다 해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허나 세상일에 있어 반드시 옳고 그름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과거 수석교두였던 궁천(穹天)이 그런 경우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 숭무지례다. 명칭은 그럴듯하지만 쉽게 무공으로 고하를 가리는 비무로 무림인다운 전형적인 방식을 그대로 실행했던 것이다. 다만 숭무지례를 청하는 것은 분쟁을 해결하는데 마지막 수단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엄격히 제한을 가했고 많은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런 교두들 간의 관례가 운중보 전체에 퍼졌던 것이다.

지금 광나한은 좌등에게 비무를 신청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운중보의 실세가 누군지 무공으로 결정하자는 의미였다. 좌등은 광나한이 이렇게까지 나올 것을 예상하지는 못한 듯 했다.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하는 듯 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자네가 정녕 그것을 원한다면 받아들이지."

후배가 청하는 비무를 마다하는 것은 무림인다운 태도가 아니었다. 더구나 좌등은 철저한 무림인이어서 청하는 비무를 마다할 사람이 아니다. 또한 좌등 역시 무림인다운 승부욕을 아직 버리지 못했다.

"언제가 좋겠소?"

흔쾌한 좌등의 대답에 광나한이 웃음을 띠우며 물었다.

"알릴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일 사시(巳時) 정각에 연무각이 어떤가? 어차피 내일부터는 운중선도 움직이지 않으니 맞이할 손님도 없고 하니 말이야."

일사천리였다. 일단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이상 두 사내는 머뭇거리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신속하게 결정되고 있었다. 광나한 역시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좋소. 그 동안 좌 선배의 위명을 흠모하였더니 나에게도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구려."

무림인에게 있어 승부는 곧 생활이다. 또한 좋은 상대를 만난다는 것 역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광나한은 중단된 모가두와의 승부보다 좌등과의 승부를 생각하니 더욱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좌등 역시 빙그레 웃었다. 그 역시 광나한과의 승부가 기다려지는 기색이었다.

"오랜 만에 자네의 북두장(北斗仗)을 볼 수 있을까?"

광나한의 경우 누구보다 소림의 권각법이나 다른 무공에도 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특기는 장(仗)이었다. 그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장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가 사용하는 장은 불문에서 사용하는 선장(禪杖)과 달리 특이하게도 한쪽에 주먹만한 수정구슬이 박힌 모습이어서 햇빛을 받으면 투명한 빛을 뿜어내기 때문에 북두장이라고 불려졌다.

사람 키보다 길어 휴대하기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소림에서 쫓겨난 이후 강호를 횡행할 때 머리를 기르고 낡은 가사를 입은 채 북두장을 짚고 다닌 특이한 차림이어서 더 유명해진 것인지 몰랐다.

그가 유일하게 패한 인물이 바로 철담. 당시 철담에게 도전했다가 북두장이 부러지는 낭패를 당하고 깨끗하게 패배를 시인한 후 철담의 휘하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좌등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구룡의 시대가 종식되기 전이지만 젊은 시절 좌등 역시 한 자루의 무적신창을 들고 운중검에게 도전했다가 패한 이후 당시 동정오우의 한 축이었던 신창대(神槍隊)의 대주로 활약했던 것이다. 일생을 통해 단 한 번의 패배만을 기록한 두 사내의 격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망은 드리지 않을 생각이오. 그 동안 북두장은 약간 변형되었소. 내일을 기대해도 좋소."

광나한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떠올라 있었다. 무인으로서 저런 정도의 배포가 없다면 운중보의 수석교두 직을 맡지 못했을 것이다.

"기대하겠네. 이것은 정식으로 보주께 말씀드리겠네."

좌등 역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역시 추태감과 만보적께 말씀드리겠소."

광나한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회의 회주인 두 사람에게 정식으로 보고를 하겠다는 뜻으로 여전히 자신의 입장을 고집했다. 좌등이 비로소 모가두에게 시선을 돌리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현무각에서 함곡 선생 일행과 함께 저녁식사를 할 생각이네. 와룡장께서도 같이 가시겠는가?"

모가두가 누런 이빨을 보이며 씨익 웃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2. 2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3. 3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4. 4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5. 5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