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무장 할 수 있었던 이유

핵우산을 씌웠던 미국에 비해 구소련의 파워는 약했다

등록 2007.04.09 09:45수정 2007.04.09 09:45
0
원고료로 응원
한국인들은 1991년 구소련 붕괴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동북아 국제질서를 미·소 대결구도로 인식했다. 미국 주도 하의 한국·일본·대만과 구소련 주도 하의 중국·북한이 상호 대립하는 구도로 파악한 것이다.

미국이 한·일·대만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구소련이 1991년까지 중국·북한을 주도하면서 미국과 함께 역내 패권을 양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구소련의 파워가 실제보다 과장된 것은 구소련의 위협을 과장하여 한·일·대만을 자국의 영향권 하에 묶어 두려는 미국의 전략적 필요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동북아에서 구소련의 파워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점은 냉전 시기의 동북아 핵 구도를 통해서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나가사키·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이래 동북아에서 하나의 핵우산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 핵우산 밑에 한국·일본·대만을 묶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핵우산에 들어감으로써 한·일·대만은 독자적인 핵개발의 명분을 상실한 채 미국의 핵우산에 안보를 맡겨야만 했다.

동북아 주요 행위자 중에서 핵개발을 달성하지 못한 혹은, 달성하지 않은 나라들이 한결같이 미국의 핵우산 하에 있는 국가들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면, 동북아에서 미국의 핵우산에 편입되지 않은 나라들은 한결같이 핵개발에 성공했거나 또는 그것을 시도했다. 소련은 1949년 8월 29일에,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북한 역시 1956년부터 소련에 핵물리학자들을 파견하는 등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북한 측이 1983년에 핵개발에 성공했다고 비공식적인 여러 경로를 통해 주장하는 것이나 1986년에 미국·프랑스 군사정찰위성이 영변 핵시설을 포착한 점들을 볼 때에, 북한이 적어도 1980년대 중반에 핵개발과 관련하여 상당한 진전을 이룬 것은 분명하다.


미국 핵우산에 편입된 한국, 일본, 대만은

여기서, 동북아에서 미국의 핵우산에 편입되지 않은 나라들은 '한결같이' 핵개발에 성공했거나 그것을 시도했다는 표현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미국 라인의 반대편에 있는 나라들은 '하나의 핵우산'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 핵 보유를 추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동북아에 소련의 단일적인 핵우산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북한·소련·중국이 각각 자국의 독자적 핵 보유에 의존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핵우산 하에서 일치단결한 미·일·한·대만 라인과는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은 하나의 핵우산 하에 동맹국들을 단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하나의 핵우산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것은, 과거 냉전시기에 구소련의 영향력이 실제로는 그리 강력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동북아 질서를 미-소 냉전구도로 파악했지만 그러한 구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냉전시대에 동북아에 존재한 것은 미·일·한·대만의 '강력하고 단일적인 연대'와 북·중·소의 '느슨하고 자율적인 연대'였던 것이다.

이 상황을 집단 검투에 비유해 보기로 한다. 미국 편에는 사람 수가 4명(미·일·한·대)이 있다. 그에 비해, 그 반대편에는 3명(북·중·소)이 있다. 그런데 미국 편에는 하나의 검(미국의 단일 핵우산)밖에 없다. 그에 비해, 그 반대편에는 적어도 2개 이상의 검이 존재한다.

이 시기에 북한도 비밀리에 핵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북한이 공식적 핵보유국이었던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중국·소련만을 공식적 핵보유국으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미국의 반대편에는 2개의 검만 존재했다고 이해하기로 한다.

미국 편에는 하나의 검만이 존재했으므로 한·일·대만의 대미 의존도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의존하지 않으면 '검투 현장'에서 중국이나 소련의 '검'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라인에 존재한 하나의 '검'은 미국의 역내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개별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자국의 안보가 위험해지기는 하지만, 이러한 위험성은 도리어 미국을 중심으로 강력한 연대를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북한이 핵 무장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

반면, 미국의 반대편에는 적어도 2개 이상의 '검'이 존재했다. '검'의 숫자 면에서는 미국 라인을 압도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2개 이상의 '검'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 라인의 국가들은 굳이 서로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 반대편에 2개 이상의 '검'이 존재했다는 점은 이 라인의 통일성과 응집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자신의 '검' 이외에 또 다른 '검'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상당히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냉전 시기에 동북아에는 미국의 핵우산 하에서 하나의 동맹을 이룬 통일적 그룹과 '나대로' 핵 보유를 추진한 자율적 그룹이 상호 대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 북한이 핵개발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부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적군 진영은 미국의 단일 핵우산 하에 4개국이 동맹을 이루고 있는 데 반해, 북한의 우군 진영에서는 '나대로' 핵 보유를 추진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스스로 책임지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만 가만히 있었다면, 북한은 미국 라인의 위협을 받는 동시에 중국·소련에 종속되는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동북아에 소련의 강력한 핵우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북한으로 하여금 독자적 핵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도록 만든 요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이 과거 냉전시대의 동북아에서 구소련의 파워는 실제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 동북아에 미국의 핵우산이 존재한 데 반해 소련의 핵우산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에, 미국이 역내에서 소련보다 훨씬 더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