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삶을 이야기하듯 그리다

[내가 만난 그림, 내가 만난 세상 4] 제주로 내려간 이왈종 화백

등록 2007.05.01 11:42수정 2007.07.0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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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 <서귀포> 종이부조에 채색, 54 X 39 cm ⓒ 이왈종

화사하면서도 기품있는 색채가 화면 가득합니다. 바다가 보이고 돌담 뒤에 수선화가 활짝 피었으니, 제주도 어느 가정집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15년 가까이 제주도 서귀포에 칩거하면서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한 이왈종 화백의 근작으로, 어디 한군데 흠잡을데 없는 '똑 떨어지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물고기의 크기가 배와 같고, 새의 크기도 개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돌담 뒤의 제주 수선은 바다를 뒤덮고 있는 등 원근법과 대상의 크기를 무시했으니, 조선시대 민화의 전통을 계승한 '현대적 민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화백의 그림에 이런 민화적 요소가 보이는 이유는 그가 한국화를 전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 그리는 재료와 방법도 전통의 바탕에서 사용합니다. 이 작품은 그가 지난 몇년간 사용하던 장지가 아니라, 닥종이 판에 그림의 대상을 입체적으로 만든 후 천연 안료로 채색을 했습니다. 그러나 닥종이 판라는 것이 결국 한지를 우려서 만든 것이니, 그는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다양한 실험을 통해 한국화의 현대화에 앞장서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화백이 서귀포로 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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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 <서귀포>, 종이부조에 채색, 53.5×39㎝ ⓒ 이왈종

위의 작품과 연속성을 갖고 있는 그림으로, 부부만이 조용히 살던 집에 친구가 찾아오자 마당에 술상이 차려졌고, 편안한 자세로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삶의 모습을 이야기하듯 화폭에 옮기는 것이 바로 이 화백이 갖고 있는 탁월한 작가적 능력이고, 그림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의 그림을 편안하고 재미있게 보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화백은 이렇게 편안한 작품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서울에서 제주도로 내려왔고, 몇차례의 변화를 거쳐 그가 추구하던 '중도의 삶'을 찾고 표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살다보면 사사로운 일들로 끊임없이 갈등하게 된다.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쾌락과 고통, 분노와 절망, 집착과 무관심 등 서로 대립되는 감정들에 휘말려서 괴로워 한다. 중도란 이러한 갈등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며 나는 그러한 것들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 화가와의 인터뷰 <아트인 컬쳐> 200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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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 <서귀포 생활의 중도>장지에 아크릴릭, 34 x 26cm ⓒ 이왈종

이 화백이 서귀포로 내려간 것은 1990년경입니다. 서울에서 미술대학 교수를 사직하고, 그림만 그리기 위해 홀로 '유배'를 갔습니다. 가장으로서 수입이 확실하고 정년이 보장된 교수직을 버리고, 수입이 불확실한 전업화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그림세계를 찾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화백은 '유배'의 장소로 서귀포를 택한 이유에 대해, 어느 인터뷰에서 "대학 시절 동백꽃 위에 눈 내리는 제주 풍경이 가슴속에 찍혀 버렸습니다. 하얀 눈 위로 살포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동백꽃의 영롱함에 반해 버렸지요"라고 밝혔습니다.

위의 작품이 작가가 살고 있는 집을 그렸으니, 방에 보이는 남자는 서울의 가족과 전화를 하고 있는 화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가의 집에는 야생 꿩이 날아들어 그들을 위해 돌함지에 물을 담아 놓았는데, 꿩이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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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 <서귀포 생활의 중도> 부분, 한지에 혼합재료, 35×50㎝ ⓒ 이왈종

이 화백은 인터뷰를 할 때 사진기자들에게 자신의 서귀포 작업실 외부 사진을 찍지 말아 줄것을 부탁한다고 합니다. 작업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러면 작업에 방해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작업실에다 <중도관정>이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자신이 추구하는 '중도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작업에 매진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유배'를 원했다해도, 서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인사동에서 친구들과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창작에 대한 자극도 받다가, 어느 날 혼자가 되어 그 외로움을 이기며 새로운 작품세계를 찾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 1년을 "형벌과 같은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이 그림은 그때 그린 작품인데, 마음을 다스리려고 붓가는대로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물론 화가는 "작가는 외로워야 한다. 외로움은 작가에게 매우 유익한 것일 수 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일이 어찌 외롭지 않고서 가능한 일인가?"라며 당시 자신의 심정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 얼마나 답답했으면 집의 꼭대기에는 부처를 그려넣고, 자신은 '미친듯이' 북을 두드렸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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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 <서귀포 생활의 중도> 장지에 아크릴릭, 51×43㎝ ⓒ 이왈종

이 화백은 서귀포에 내려와 몇번의 변화를 거칩니다. 첫번째 작업은 제주의 풍광을 먹만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과정은 그가 제주도의 자연과 풍토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작업은 탈춤을 종이부조 위에 표현하는 <생활 속의 중도> 시리즈였는데, 그리 많은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작업이 서귀포 생활 8-9년 만에 완성한 <서귀포 생활의 중도> 시리즈인데, 그는 이 그림들을 갖고 화단과 애호가들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서귀포 생활의 중도> 시리즈는, 장지에다 조개가루와 안료를 혼합해 바르고 다시 평평하게 긁어낸 후, 그 위에다 그림을 그려나가는 기법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화폭에는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선화, 고기잡이 배, 돌하르방, 돌 담, 야생 꿩, 노루 등과 사람 사는 모습을 기본 소재로 그린 후,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인 삶의 모습를 담았습니다.

이 화백은 평범한 삶의 중심이 집과 부부에서 시작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을 많이 표현했는데, 위의 작품도 그 계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 속에 있는 집에서는 남편이 부인에게 혼이 나는 모습을 그려넣었고, 골프채와 자동차가 보이는 아래 집에서는 남편이 혼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돈 잘 벌어오는 남편의 모습과 돈 못 벌어오는 남편의 모습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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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 <서귀포 생활의 중도> 장지에 아크릴릭, 34×26㎝ ⓒ 이왈종

이 작품은 이왈종 화백 특유의 해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남편이 어디 나가고 집에 홀로있는 아줌마가 아령으로 체력단련을 하는 모습인데, 화가는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왜 아줌마가 체력단련을 하는지 아느냐는 짖궂은 질문을 던집니다.

물론 화가로서 웬만한 자신감이 없으면 던지기 힘든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화백은 자신의 그림이 화가만의 그림이 되기를 원치 않기에, 그리고 자신의 그림이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보는 사람들을 당당하게 그림 속으로 불러 들이는 것입니다.

경매에 얽힌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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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 <서귀포 생활의 중도> 장지에 아크릴릭, 23×31㎝ 이왈종 <서귀포 생활의 중도> 장지에 아크릴릭, 23×31㎝ ⓒ 이왈종

이 그림은 몇년전 많은 언론들의 문화면에 소개된 작품입니다. 그런데 작품 사진이 소개된 게 아니라, 이 작품에 얽힌 경매 일화가 실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림값을 산출할 때, 1호 크기에 얼마고 이 작품은 크기가 몇호이니 곱하면 얼마다, 라는 계산법을 아직도 많이 사용합니다. 따라서 위의 작품은 4호이기 때문에, 당시 이 화백의 호당 작품값으로 계산하면 2백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경매장에서 두사람이 일종의 '오기 경합'을 벌여, 중간에 경매사가 시중가에 비해 경매가가 너무 올라가고 있음을 계속 알려주는 진풍경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7백만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이 화백은 그림을 많이 그리지 않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기다리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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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 <서귀포> 종이부조에 채색, 33.7 X 24cm ⓒ 이왈종

이 작품은 이 화백의 최근작으로, <서귀포 생활의 중도> 시리즈 이후 기법을 또 한번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매우 밝은 작품세계를 보여줍니다. 맨 위에 소개한 두작품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물고기와 새를 등장시켜 여전히 서귀포임을 알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인물들의 특징을 좀더 구체화 시겼습니다. 숲 속에서 남녀가 뒹구는 모습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줌마를 통해 우리나라 아줌마들의 불만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왼쪽의 모자 쓴 아저씨를 통해서는, 시골에서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친절한 이웃 아저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왈종 화백은 그가 제주도에 까지 '유배'와 찾았던 '중도의 세계'가 이런 평범한 소시민의 삶임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오늘도 서귀포 '종가집 설렁탕'에서 이웃 친구들과 아침을 먹으며, 환하고 밝은 색으로 평범한 삶을 재미있게 나타낼 수 있는 그림을 구상합니다.
#이왈종 #제주도 #현대적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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