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주인이 바뀌었다... "알아 모셔라"
명나라에 들어간 통사(通事) 강방우의 보고를 받아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급주마(急走馬)에 띄워 올린 장계였다.
“연왕(燕王)이 전승하여 건문황제(建文皇帝)가 봉천전(奉天殿)에 불을 지르게 하고 자기는 대궐 가운데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후비와 궁녀 40명도 스스로 죽었고 17일에 연왕이 황제의 위(位)에 올랐습니다. 도찰원첨도어사(都察院僉都御史) 유사길과 홍려시소경(鴻臚寺少卿) 왕태가 조서(詔書)를 가지고 이미 강을 건너왔습니다.”
숨 가쁜 보고였다. 요동치던 대륙이 마침표를 찍었다는 장계였다. 3년간의 내전 끝에 대륙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내용이었다. 대륙을 섬기는 조선은 바뀐 주인을 새 주인으로 맞아야 하는 소국이었다. 조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보고를 받은 태종 이방원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에 이끌려 임팔라실리 문제로 연왕과 맞섰다면 얼마나 많은 시련이 밀려올까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책이 필요했다. 즉각 대신회의를 소집했다. 의견은 많았지만 뾰쪽한 답은 없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넷째아들로 태어난 연왕은 아버지가 태손으로 책봉한 맏형의 아들 건문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의 위(位)에 올랐다. 나이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황제에 등극한 영락제다. 훗날 단종을 몰아내고 등극한 수양대군과 너무나 흡사하다. 수양대군이 벤치마킹했을까?
이상동몽이 현실이 되었다
영락제는 태종 이방원이 사신으로 남경 가던 길 북경에서 면대한 인물이다. 첫 인상이 그릇이 큰 위인이라 느껴졌다. 야심으로 이글거리던 그의 눈 꼬리가 왕으로 만족할 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연왕 역시 이방원이 야인으로 머물러 있을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동상이몽이 아니라 이상동몽(異牀同夢)이었다.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대륙의 주인이 바뀌었다. 북경에서의 면담을 기회로 삼고 싶었다. 비록 위상은 다르지만 이제 황제로 등극한 연왕보다 자신이 먼저 조선 국왕에 올랐다. 연왕이 황제로 있을 때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 하고는 순서가 다르다. 여기에서 절묘한 수를 찾고 싶었다.
대명외교 전략에 고심하고 있던 태종에게 황제가 보낸 사신이 벽란도나루를 건넜다는 소식이 대궐에 전해졌다.
태종 이방원은 면복차림에 대소신료를 거느리고 몸소 서교에 나아가 사신을 맞이했다. 황제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온 사신은 황제의 대리인이다. 여타의 다른 사신들처럼 대궐에서 맞이할 수 없었다. 태종의 안내를 받으며 무일전에 이른 도찰원첨도어사(都察院僉都御史) 유사길은 황제의 조서를 반포했다.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詔)하노라. 고황제께서 군신(群臣)을 버리시고 건문(建文)이 위(位)를 이으매 헌장(憲章)을 변란(變亂)시키고 골육을 살해하여 화기(禍幾)가 거의 짐(朕)에게 미치게 되었다. 짐이 종묘·사직이 중하여 황제의 위에 올라 천하에 선포하노라. 명년(明年)을 영락(永樂) 원년(元年)이라 할 것이니 너희 조선은 마땅히 이를 알지어다.”
영락제는 고려출신 여자의 아들일까?
영락제 시대의 개막선언이다. 조카 혜제를 폐하고 황위(皇位)에 오른 영락제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26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이다. 묘호도 이방원과 같은 태종이다. 중원의 태종과 변방의 태종이 밀고 밀리며 역사를 끌어간 셈이다. 영락제는 주원장의 고려출신 둘째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인된바 없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20세에 북경을 다스리는 연왕이 된 영락제는 북벌군을 지휘하며 그의 존재를 대륙에 알렸다. 아버지 주원장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맏형이 죽고 조카 윤문이 황태손에 책봉되자 절망했다. 아버지가 죽고 조카 혜제가 건문제로 등극하자 생명의 위험을 느낀 그는 군사를 일으켜 황도(皇都) 남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산둥성 서부지역과 화이어강 유역을 초토화 시키며 연왕군이 남경에 진입했을 때 궁궐은 불타고 건문제의 시신은 찾을 길이 없었다. 황도를 접수한 연왕군은 건문제가 스스로 불타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물증이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건문제가 궁궐을 탈출하여 숨어살았다는 가설의 원인제공 인자가 되었다.
건문제를 폐하고 황위에 오른 영락제는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오늘날의 베이징이다. 자금성과 천안문도 모두가 영락제의 유산이다. 대륙을 평정한 영락제는 안남(베트남)을 수중에 넣고 눈을 해외로 돌렸다.
정화함대를 앞세워 남아시아를 정벌하고 동아프리카에도 명나라의 존재를 알렸다. 뿐만 아니다. 티베트와 네팔도 손아귀에 넣고 아프가니스탄과 투르키스탄까지 손을 뻗쳤다. 영락제의 등장은 조선에게 위축을 강요했다. 명나라의 팽창은 조선에게 재앙이었다.
팽창주의를 구사하는 영락제에게 조선이 맞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러한 영락제에게 태종 이방원이 맞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전을 겨뤄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고 요동의 주인이 되었을까? 명나라의 침공으로 한반도는 쑥대밭이 되었을까? 조선이라는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지고 명나라에 편입되어버렸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하지만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영락제의 등장과 함께 조선은 건문 연호를 버리고 영락 연호를 쓰게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연왕 시대를 마감하고 황제에 등극한 영락제가 보낸 사신을 태평관으로 안내하여 극진히 대접했다.
명나라의 정세파동은 조선에게는 대형 해일이다. 하물며 황제가 바뀌었으니 조선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것도 순리적인 승계가 아니라 정변과 내전에 의한 자리바꿈이었으니 기회 활용 범위도 크고 위험부담도 더 크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고 싶은 것이 태종 이방원의 욕망이었다.
대명외교의 새판을 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명나라의 내부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태종은 하륜을 하등극사로 파견했다. 명나라를 속속들이 알아 오라는 것이었다. 지혜주머니 하륜이 소임을 완수 할 수 있을지 그것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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