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영
김익한 이병! 아니, 용상스님! 이제야 스님이라고 불러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스님과 저는 1982년 논산 훈련소를 거쳐 8주간의 주특기 훈련을 받을 때 만났습니다. 그 후로 편지 한 통,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한 채 25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25년이라는 세월이 불가에서는 찰라에 불과하겠지만요.
합천 해인사 출가. 법명은 용상(속명은 김익한). 아주 오래된 낡은 수첩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스님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바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서입니다. 절집 행사에는 지장이 있었겠지만 오후부터 단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요 며칠 물꼬 걱정에 목마른 논두렁을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풀들만 무성한 논바닥에 단물이 고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처가 식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는 바람에 늦은 밤이 돼서야 집 근처에 있는 계룡산 갑사에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갑사 가는 어둔 길목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 때문에 그런지 경내에는 연등만 힘 없이 걸려 있고 늦은 밤 탑돌이 하는 중생도 스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사에는 내원암이라는 작은 산내 암자가 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과 셋이서 점점 굵어지는 빗속을 뚫고 내원암을 찾아갔는데 그곳 역시 아무도 없었습니다. 신도들은 모두 다 떠났고 스님 홀로 빈 절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스님이 내주는 과일을 먹고나서 덤으로 수박 한 통을 얻어 들고 다시 인적 없는 빗속을 뚫고 나오다가 불현듯 용상 스님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1982년 초여름, 이맘때였을 것입니다. 연병장에는 비가 질척질척 내렸습니다. 그 빗속에서 스님과 단 둘이서 오후 내내 그 너른 연병장 한가운데에서 뺑뺑이를 돌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아마 훈련이 없는 공휴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군기를 잡는다는 목적으로 느닷없는 집합 명령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날도 역시 집합이 있었는데 우리 둘은 그 집합 명령에 고개를 돌리고 PX에서 빵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습니다. 부대가 발칵 뒤집혀 훈련병 동료들이 우리 둘을 찾아올 때 까지 말입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스님의 꾀임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때 나는 솔직히 무척 두려웠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집합명령을 받고 아마 스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빵이나 먹자구, 지들끼리 집합하게."
그 군기 살벌한 점호 시간에도 스님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동료 훈련병들이 바싹 긴장된 표정으로 침상 끝에 부동자세로 정렬해 있을 때 스님은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가롭게 발가락을 후비고 있었으니까요. 구대장이 출입문으로 들어올 쯤에서야 엉거주춤 일어났으니까요. 그렇게 스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당당한 수행자였습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 우리 둘의 훈련복은 온통 진흙투성이였습니다. 연병장을 안방 삼아 빗물과 땀으로 범벅된 몸뚱아리를 신나게 굴리고 있었습니다. 그 너른 연병장을 십여 바퀴 돌다가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에 구대장의 군홧발까지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진흙 묻은 얼굴을 마주보고 표 나지 않게 웃고 있었습니다.
합천 해인사에서 계를 받았다는 스님은 군종병을 거부하고 일반 사병으로 입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내 짧은 소견으로는 온몸으로 중생을 바로 보고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 일반 사병, 중생의 길을 택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수행자로서 중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우리는 8주의 지긋지긋한 훈련 기간을 보내며 짬짬이 현실 종교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눴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녀님이 된 스님의 출가 전 애인 얘기를 해가며 서로 벽을 쌓고 있는 종교들에 대해 혈기왕성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나 역시 한때 입산수행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승복을 입는다는 것에 영 자신이 없었습니다. 공밥 먹고 제대로 중생 구제의 길을 걸어 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홀연 단신 인도 행을 꿈꾸다가 인도 갈 여자를 만나 뒤늦게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지금은 시골에 들어와 글을 써가며 농사를 지어가며 평범한 중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잔머리를 굴려가며 글을 쓰고 생각 없이 농사일에 매달려 살아가며 가끔씩 스님들 흉을 보기도 합니다. 훈련소에서 스님과 대화를 나눴던 그런 얘기들 말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님 말대로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행하는 수행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