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02회

등록 2007.05.28 09:22수정 2007.05.28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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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번 중 건번(乾幡)과 진번(辰幡)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고, 이번(離幡)마저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채 돌아와서는 몇 마디만 전하고 입을 다물어버리자 추태감으로서는 노기가 치밀어 오르기보다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삼재와 팔번을 너무 과신했던 탓일까? 이런 결과는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다. 더구나 건번의 시신을 청룡각 앞에 가져다놓은 의미는 일종의 경고였다. 귀산이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귀산을 처리하러 가다가 다른 누구에게 당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귀산을 처리한 후에 돌아오다가 당한 것일까?


건번과 이번은 완전한 실패였다. 이번(離幡)은 함정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함정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실패했을 것이란 충격적인 말을 했다. 상대를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말이다. 이 말에 추태감보다 더 당황했던 인물들은 바로 삼재였다.

결국 운중보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철담이 알아서 처리해 주었기 때문에 너무 쉽게 생각하도록 했던 탓도 분명 있었다. 철담이 죽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그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것이 이렇듯 심각한 판단의 착오를 가져오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철담의 죽음은 운중보의 모든 상황을 과거와 판이하게 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했다.

어젯밤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서는 엽락명의 보고에 의해 알 수는 있었다. 허나 운중보 내부의 정보 역시 엽락명과 곽정흠에게 의존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팔숙의 존재는 모르기 때문에 더욱 치명적이었고, 두 사람이라고 해서 팔숙 중 하나가 아니란 확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운중보에서 믿을 수 있는 인물은 이제 없었다. 자신이 데리고 들어온 수하가 아니라면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들의 말이나 행동이 누군가에 의해 다른 쪽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건번의 죽음과 이번의 몇 마디가 그런 의심을 더욱 확실한 사실로 만들고 있었다. 결국 아들인 추교학으로 하여금 직접 움직여 정보를 취합하도록 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추교학이라면 외부인이 아니라 운중보의 어느 곳이든 마음대로 움직여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을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애꿎은 삼재만을 닦달하고 있는 동안 정말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상만천이 자신의 조찬 초대에 응하겠다는 전갈과 함께 곧 당도하겠다는 사실을 경후가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이 상만천에게 조찬을 함께 하고자 했던 것은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자신에게 동조하거나 굴복하겠다면 올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오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었다. 따라서 상만천이 왔다는 것은 확실히 좋은 소식임에 틀림없었다.

지금 판단의 착오로 인하여 거동조차 불편한 이번을 포함해 믿었던 전력인 수하 셋을 잃은 상황에서 상만천의 방문은 그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했다. 심기가 불편할 때일수록 내부인이 아닌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혼자 온다고 했는가?"

또한 상만천이 예상과는 달리 자신의 초대에 응한 것은 어제 그의 이목이라 할 수 있는 일접과 사충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역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상만천 역시 충격을 받은 터라 자신과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일은 쉽게 풀려갈 수 있다.

"용추와 두 딸, 그리고 수하 네 명을 대동한다고 하였습니다."

"딸들까지....? 꽤 많이 데려오는군. 그 자리에는 교학이도 참석시켜.... 자리가 비좁겠군."

"하온데... 철기문의 옥문주는 어찌해야 하올런지...."


경후가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철기문에서는 반 시진 전에 이미 연락이 온 터였고 보고도 했다. 어차피 철기문도 이용해야 할 존재였기 때문에 승낙을 한 것인데 갑자기 예상하지 못했던 상만천이 초대에 응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지....음...."

추태감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했다. 자신이 데리고 있던 비영조의 두 놈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철기문의 단혁과 두 장로가 당했다는 소식에 충격보다는 그런 놈들을 수중에 넣지 못한 것이 더 안타까웠다. 그저 소모품으로 생각했던 것은 확실히 잘못된 판단이었고, 이제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 나간 호랑이 두 마리는 자신에게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들이댈 터였다.

"같이 합석을 시켜야 하는지..."

"말이 안 되는 소리..... 철기문에 전갈을 넣어. 한 시진 후에 보자고.... 조반은 같이 하지 못하겠노라고 말이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읍을 하는 경후의 머리 위로 추태감이 덧붙였다.

"이곳에 들어와 있는 각파의 장문들을 소집해 봐. 소림과 무당은 물론이고 어디든 상관없어. 점심을 같이 하자고 말이야."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아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자신이 부를 때 온다면 아군이랄 것까지는 없어도 최소한 적이 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이다. 아주 단순한 논리였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지금에 있어서는 피아를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상만천을 부른 것 같이 말이다.

추태감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삼재를 힐끗 보았다. 그것은 지금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과도 같은 시선이었다.

"운중이 나서주어야 하는데..."

"제자가 어찌 감히...."

장문위는 일단 사양했다. 그저 도리를 따져서 사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분이나 서열이 이 일을 맡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더구나 좌총관과 관련된 일이 아닙니까? 사실 좌총관께서는 사부님과 비슷한 연배이신데 감히 제가 주관을 하다니요....?"

"이 일을 주관할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노부나 중의가 나서 주관을 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고.... 운중이 나서주어야 하는데...."


성곤이 고개를 약간 흔들며 장문위를 설득했다.

"사부님께서는 이번 숭무지례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하신 듯 합니다. 그러니 더 더욱 제자가 나서는 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허... 그리 말해도 못 알아듣겠나? 자네는 그래도 이곳 운중보주의 대제자가 아닌가? 사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간단한 일인 것을....."


좌등과 광나한의 숭무지례를 주관할 사람은 마땅치 않았다. 숭무지례는 처음에는 교두들 간, 나중에는 운중보 전체로 퍼졌지만 그 주관자는 의례 수석교두나 그 윗대의 인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숭무지례는 운중보 초유의 일이라 할 정도로 거물들의 일이다. 하나는 주관자가 되어야 할 수석교두요, 또 하나는 동정오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총관 역할을 한 좌등이다. 이들의 숭무지례라면 주관자가 될만한 인물은 동정오우밖에 없다. 귀산노인이야 무공과 상관이 없는 인물이니 굳이 거론할 바도 없는 터.

허나 이미 어젯밤 좌등도 직접 보고했었고, 또한 성곤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보주로서는 아주 못마땅하다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좌등을 야단치거나 나무라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곧 떠날 운중보에서 쓸데없는 일을 벌렸구만' 하고는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그것은 숭무지례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거나 동의한 것이 아닌 매우 애매한 태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약속된 것을 파기하라거나 하는 것은 무인에게 있어 죽음보다 더 심한 치욕을 감수하란 말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좌등의 편을 들기에는 보주라는 입장에서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추리무협소설 #천지 #추태감 #운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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