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03회

등록 2007.05.29 08:18수정 2007.05.2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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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보주의 태도로 보아 숭무지례에 입회를 할 것 같지도 않은 분위기여서 어쩔 수 없이 지켜보던 성곤이 나서 사람을 지목한 것이 바로 대제자인 장문위였다. 그러고 보니 더 적절한 인물도 없었다. 배분이나 서열로 보아서는 이미 한 대 아랫사람이지만 보주를 대표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사부님께서 허락을 하시면 몰라도…."


장문위로서는 사실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사부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일을 사부를 대신해 주관한다는 것부터가 문제였고, 광나한이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관계로 윗대라 할 수는 없었지만 좌등은 그저 사부의 수하가 아니었다. 사부는 좌등에 대해 형제의 우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미 노부가 말했네. 자네의 사부는 반대하지 않았어. 그러면 되었지 않나?"

"……!"

성곤이 이렇게 나오는데 할 말이 없었다.

"노부나 중의는 입회인 자격으로 참석할 것이네."

다짐을 받듯 부언하는 성곤이었다.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장문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분부를 받겠습니다."


사부님께 가서 확인을 해보아야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동정오우의 존재는 언제나 사부와 같은 존재였다.

"자네도 이번 숭무지례가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게야… 간혹 이곳에 들락거린 노부도 알고 있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더욱 자네가 나서야 하는 게야."


알고 있다. 이번 숭무지례가 가진 의미를 대제자인 자신이 왜 모를까? 좌등이 나선 이유도 그럴 것이다. 성곤의 설득과는 달리 그래서 더 나서기 싫은 것이다.

"제자로서는…."

"참석할 인원은 되도록 줄이는 것이 좋을 게야. 물론 그렇다고 장문인들 마저 배제하면 안 될 것이고…. 장소는 연무원(鍊武院) 대청이 좋겠지."

이미 성곤은 생각해 해놓은 듯 했다. 그나마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막막했던 장문위에게는 그런 분부가 오히려 편하다. 더 이상의 사양은 결례다. 나중에 사부께 용서를 구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젠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하지만 하던 식사는 계속 하세나."

성곤이 이제 좀 후련하다는 듯 음식에 손을 댄다. 따라서 음식을 입에 넣은 장문위는 마치 모래알을 씹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네가 나설 때야."

의미심장한 한 마디. 이 말의 의미를 성곤이 생각하고 있는 내심과 동일하게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장문위는 음식을 삼키다말고 갑자기 목에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장문위 역시 자신이 나설 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식탁에 앉은 상만천을 보자마자 추태감은 상만천이 초대에 응한 것은 자신이 예상했던 의미로 온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상만천이 입고 있는 금포는 요란했다. 거동하기에 매우 불편한 복장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금포가 주는 의미는 충격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만천의 금포는 색과 모양에 있어 약간 다르다고는 하지만 황상(皇上)만이 입을 수 있는 용포(龍袍)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한 금포를 입고 왔다고 하는 것은 상만천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최소한 추태감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러 온 것은 아니라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자… 들지…."

추태감은 좌중을 둘러보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추태감의 예상대로 식탁이 비좁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아랫사람들이라 해서 그래도 상만천이 데려온 사람들인데 따로 추리는 것도 좋을 것 같지 않아 합석을 시키다보니 열댓 명이 넘는 것이다.

상만천의 식구만 해도 상만천을 비롯해 여덟이었고, 추태감이 합석시킨 삼재와 추교학까지 다섯이다. 중의 역시 참석하기로 했지만 어쩐 일인지 아직까지 당도하지 않고 있다. 팔번도 이 자리에 참석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으나 어제일 이후로 의기소침해 있었고, 또한 이곳의 말이 밖으로 새는 것 같기에 철저하게 주위를 감시하도록 지시했던 터.

"북경 음식이라 강남 사람들의 입맛에 맞을는지 모르겠군."

소채를 입에 넣고 몇 번 씹던 추태감이 은근히 상대를 생각해 주는 척했다. 허나 이 말은 상만천의 뿌리가 강남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것이었고, 아무리 중원 최고의 재력가이라고는 하나 강남 출신에 불과하다는 의미도 담겨있었다. 감히 북경을 넘보지는 말라는 뜻이다.

"별 말씀을 소제는 오히려 북경음식이 입에 맞더이다. 한 번 태감을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정성껏 북경요리를 준비하겠소이다."

상만천은 빙긋이 웃으며 입에 넣은 음식이 맛있다는 듯 씹었다. 그 말 또한 몸은 북경에 있지 못하나 마음은 항상 북경에 가 있다는 말. 역시 만만치 않다. 일단의 전초전은 서로 무승부다.

"좋은 생각이네. 자네의 초대라면 본관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정면으로 날을 세워 부닥칠 필요는 없다는 완곡한 말이다. 어느 정도 타협의 여지를 두고 대화를 시작하겠다는 의미의 전달. 상만천 역시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었다.

"오늘 저녁은 어떠신지…?"

"역시 재보는 모든 질질 끄는 법이 없구만… 좋으이… 본관 역시 오늘 저녁 자네와 같이 했으면 좋겠군."

'가겠다'라든지 '그러세'라는 명확한 승낙이 아닌 '같이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은 분명히 여지를 두는 말이었다. 그것은 '지금 자네와 대화가 잘 된다면 가겠다'라는 조건이 달린 말이었다.

"운중보 안에서 태감을 모시게 되다니 그 간의 소원이 성취되는 듯 싶소이다."

오는 것을 기정사실화 했다. 그것은 지금부터 두 사람 간의 대화가 잘 될 것이라는 상만천의 암시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자는 의미도 담겨있다.

"자네가 아끼던 아이들이 불행한 일을 당했더군."

갑작스럽게 추태감이 기습을 했다. 일단 상대의 허를 찌르고 유리한 위치를 점하자는 의도다. 그럼에도 상만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덟 개의 기둥 중 네 개가 빠진 것과 다름이 없소이다."

여덟 개의 기둥은 팔번(八幡)을 가리킨다. 그 중 네 명이 사라졌다는 의미다. 역시 만만치 않다. 역시 상만천은 자신에게 굴복하러 온 것이 아니다.

"퇴로를 열기 위함이었나?"

어제 이곳에 와 있는 흑백쌍용까지 대동하고 운중선에 침입하고자 한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더구나 일접사충 중 일접이충을 잃는 비싼 대가를 치른 이유가 궁금했을 것이다. 하지만 함곡의 부인을 납치하려다가 운중선에서 사라졌다는 내막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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