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십년 전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오십년 전의 일은 알고 계십니까?”
오십년 전이라면 하달이 다섯 살이던 때였다. 그때의 기억에 대해서 하달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웃어른들이 전하는 말도 없었다.
“오십년 전의 일은 까마득해서 나도 알지 못하는 일인데 당신은 안다는 것인가?”
수걸은 자신의 땋은 머리를 보였다.
“전에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풀어 헤쳤으나 난 원래 이렇게 세 갈래의 땋은 머리를 하고 있소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그 일이 제 할아버지 때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한 가닥을 땋았고 그 아들이 태어났을 때 두 가닥을 땋고 그 손자가 태어났을 때 세 가닥을 땋았습니다”
하달은 그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수걸의 말속에서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거기에는 무슨 깊은 한(恨)이 있기에 그토록 잊지 않는 것일까?’
수걸은 하달의 굳은 얼굴을 보고 피식 웃으며 아예 맨바닥에 앉아 말했다.
“내 하달장로께는 허심탄회하게 말하겠소. 삼십년 전의 한을 기억하고 이를 가는 사람은 두레마을에서 하달장로를 비롯해 몇몇 이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우리 너르족은 모두가 오십년 전의 한을 기억하면서도 이제는 이를 잊고 두레마을의 도움을 받으러 온 것이외다. 아시겠소?”
“그 오십년 전의 일이 무엇인가?”
하달 역시 수걸처럼 땅바닥에 앉아 그 얘기를 들으려했지만 그 순간 어둠 너머로 너울대며 다가오는 횃불의 무리를 보고서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결국 뜸을 들여 나를 사로잡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 했던 수작인가?”
하달은 호통을 치며 점점 수걸에게서 멀어졌다. 수걸은 어찌된 영문인지 뒤를 돌아본 후 당황하여 소리쳤다.
“하달 장로! 멈추시오! 그런 뜻이 아니외다! 저들은 내가 돌아가라고 할 것이오!”
하달은 그런 수걸의 말을 무시하고 있는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하달은 목책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좁은 구멍을 통해 정신없이 기어들어갔고, 그곳에는 처얼을 비롯한 두레마을의 장정들이 잔뜩 몰려들어 하달을 맞이하고 있었다.
“장로님!”
하달은 속히 구멍을 막을 것을 지시한 후 대뜸 화부터 내었다.
“모두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목책위에서 방비를 엄히 하라 하지 않았느냐!”
장정들은 뜨끔하여 사방으로 분주히 흩어졌다.
“적이 도랑을 메우고 있습니다!”
목책위에서 망을 보던 장정들이 우왕좌왕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달이 서둘러 목책 위로 올라가 보니 불꽃이 너울거리는 모습이 확연히 눈에 뜨였다. 하달은 마악을 비롯한 장로들을 불러 모았다.
“적들은 당장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오. 경계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음을 편히 가지고 휴식을 취해라고 전해 주시오,”
장로들은 하달의 말을 모두에게 전했으나 한번 동요하기 시작한 두레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급기야 마을의 꼬마들까지 목책위로 올라가 소란을 피우는 등 마을의 분위기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때 처연한 노랫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자극했다.
“......그가 사냥한 짐승은 사람 짐승이었다네 어허디뎌 어히랴 디려. 그 애비의 아들은 이미 여인의 몸속에 있었지 랴리량셩 디뎌. 그 일족들은 눈물을 흘렸다네. 그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 밤하늘의 은하수가 되었네. 디러셔러 어라디려 큰 다툼이 있었고 하늘은 갈라지고 땅에는 사람의 시체가 쌓였지. 그리고 모두가 떠나갔다네. 흘러가는 까마귀 떼를 따라 떠나갔다네......”
그 노래는 유란이 목책 아래를 돌아다니며 부르는 것이었다. 혼란에 빠졌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덧 그 노랫소리에 조금씩, 조금씩 평온함을 되찾고 있었다.
“장로님, 적들이 물러갑니다.”
잠깐 동안의 움직임으로 도랑을 메운 너르족들은 더 이상의 도발을 하지 않고 물러서 다음날의 큰 싸움을 대비하고 있었다. 목책위의 두레마을 사람들 역시 하달의 지휘 하에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긴장감 속에 밤을 지새웠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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