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마지막 종부 광주이씨의 유서

[녹색의 장원 녹우당 35] 근현대 격변기의 고단한 삶 묻어나

등록 2007.06.12 08:52수정 2007.06.12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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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한일 합방으로 인해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게 된다. 국가의 존망이 결정되는 이 시기에 해남윤씨가는 어떤 모습으로 가업을 유지해 나갈까?

우리나라는 식민지의 운명을 가야했지만 5백년을 이어온 해남윤씨가의 가업은 계속된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처럼 가족이나 씨족도 극심한 변혁의 시대에 부대낌을 당해야 했던 것이 근대기 모든 사람들의 삶이었다.

이 시기 녹우당 해남윤씨가는 고산의 12대손인 윤정현(1882~1950)과 부인인 광주이씨(1882~1971)가 종통을 이어가고 있던 시기로 이들의 생존연대가 말해주듯 이들은 조선왕조시대에서 근대기로의 전환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해남윤씨가에는 이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하는 광주이씨 종부가 쓴 한통의 한글 유서가 전해져 오고 있다. 아들(종손)에게 한글 편지형식으로 남긴 이 유서에는 한 여인의 고단한 삶의 여정이 한껏 묻어나 있다.

근대기 광주이씨 종부의 고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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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 격변의 시대를 살다간 해남윤씨가의 종부인 광주이씨 부인. '규한록'을 쓴 19C의 광주이씨 부인을 떠올리게 한다. ⓒ 녹우당

해남윤씨가는 조선왕조의 기운이 다해가는 19세기 무렵 종통이 제대로 계승되지 않아 대가 끊길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다행히 종부인 광주이씨 부인에 의해 겨우 집안을 추스르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보다 더 예측할 수 없는 때가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으로 나라를 잃고 새로운 시대로의 변혁을 겪어야 했던 근대기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이자 식민지 하에서 새로운 생존의 방법을 강구해야 했던 이 시기는 한 집안의 존망이 짧은 순간에 결정되어 버리기도 하였다.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문중사를 놓고 볼 때도 이 시기는 매우 어려운 때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 토지를 기반으로 유지되어 온 양반지주의 신분사회가 완전 해체되고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도입해야 했기 때문에 '모험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살았던 종부로 해남윤씨가의 가업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이가 윤정현의 부인인 광주이씨(1882~1971)다. 해남윤씨가는 광주이씨가와 유독 인연이 깊음을 알 수 있다. 고산의 8대손 종부이자 '규한록'을 쓴 광주이씨 부인은 기울어가는 해남윤씨가를 다시 일으킨 종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보성(대곡)지역에 근거를 두고 행세했던 광주이씨는 조선시대 양반가의 결혼이 명문가와의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당파적 관계를 떨쳐버릴 수 없었듯이 광주이씨 또한 같은 남인계열로 이들의 결혼도 이 같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이씨 부인이 1834년(순조 34년)에 쓴 '규한록'은 순 한글로 쓰여진 작품으로 잠시 친정인 보성 대덕에 가 있을 때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소회를 궁체상서(宮體上書)로 쓴 편지형식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규한록을 쓴 광주이씨의 4대손 종부가 정현의 부인인 광주이씨로 한글로 쓰인 편지형식의 유서가 규한록과 매우 유사함을 느끼게 한다. 그 내용 또한 종부의 고단한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더욱 동질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윤정현과 광주이씨 부인은 해남윤씨가에 있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종손이자 종부로 살다간 인물이다. 윤정현은 현 종손의 조부로 6·25가 나던 해에 사망했으나 현 종손의 기억 속에도 아직 생생하다. 하지만 윤정현이 태어나던 1882년(고종19)은 조선왕조가 유지되고 있던 때로 이때를 생각하면 아주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혼란의 시대 상황 속에서 살아갔을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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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부인이 남긴 이 유서는 자신이 죽기 6년전인 86세(1964년)에 장남에게 남긴 편지형식의 글이다. ⓒ 녹우당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그것도 일본에 의해 병합 되가는 상황, 그리고 6·25 전란의 극단적 대결 속에서 가업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이 당시는 조선시대 양반가의 절대적 기반이었던 토지가 일제하에서 토지조사사업으로 새롭게 편성되고, 6·25가 끝난 후 토지몰수와 분배의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지주들이 몰락하는 상황을 볼 때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광주이씨 부인이 남긴 유서에는 이 같은 어려운 시대를 지낸 한 여인의 고단한 삶을 잘 느껴 볼 수 있다. 광주이씨 부인의 6남2녀 중 다섯째인 윤영표씨가 편집 발간한 '녹우당의 가보' 맨 뒤에는 광주이씨 부인의 유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유서는 광주이씨 부인이 죽기 6년 전인 1964년(84세) 큰 아들에게 남긴 것이다.

이 유서는 오늘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남기는 그런 유서라고 할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옛 고문서의 형식과도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부모가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분재기인 '허여문기' 같기도 하다. 이 유서는 옛 고문서의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고 자신의 심회를 간단히 쓴 것이어서 하나의 문기로 보기는 어렵지만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라는 내용이 들어있어 분재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 여인의 고단한 삶의 여정 담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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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서에는 한 여인의 고단한 삶의 여정과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뜻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 녹우당

이 유서를 보면 서두에 하루빨리 세상을 하직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절하다. '규한록'의 광주이씨 부인이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토로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광주이씨 부인의 남편 윤정현은 69세라는 작지 않은 나이에 작고하는데, 광주이씨 부인은 남편이 죽고 나서도 20여년을 더 살다가 90세에 작고한다. 그 생존연대에도 한 세기의 역사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유서의 서두를 보면 "어서어서 저 세상에 가서 우리 부모님 슬하에 있기를 원하나 이렇게 목숨이 질긴지…, 어서 싫증나는 이 세상을 하직하여 모든 일을 잊고…"라며 자신의 삶의 여정에 대한 심정을 밝히고 있다.

광주이씨 부인은 6·25동란 중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과 문서들을 벽장에 숨기고 이를 흙으로 발라 문서를 보존하게 하여 현재의 많은 유물들이 남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부인은 팔남매를 낳아 칠남매를 결혼시킬 정도로 한 가문의 종부로서 자손을 많이 번창 하게 했다고 할 수 있는데,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 잘날 없다고 유서를 보면 자식들 때문에 속을 많이 썩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운이 비색하고 내 죄가 그다지 많아 어미 앞에서 어미 가슴에 칠 못을 박고 불효하니(세상을 먼저 뜨니) 원통하고 슬프고 서러운 마음 하소연할 곳 없어 세상 하직하여 저 세상에서 우리 내외, 자식들 찾아보고 싶으나 그도 내 정성이 부족하여 하루 이틀 보내며 내 새끼 사남매(영선, 영린, 영표, 선혜)나 오래오래 살아 부귀 창성하기를 주야 축원하였으나 내 영린이 무슨 죄로 저 모양이 되어 남에게 천대받고 제 신세 의지할 곳 없으니 어찌할꼬"라고 자식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 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식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을 잊어버릴 수 없었던지 "금당리 언장(干拓畓) 중에서 열마지기를 떼어 영린에게 주어라. 이것으로 자식들 가르치고 먹고 살도록 하여라"면서 자식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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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광주이씨로 1834년 해남윤씨가의 종부가 지은 '규한록'. ⓒ 녹우당

이 유서를 보면 광주이씨 부인은 재산을 분배하는 재주(財主)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분재기에서는 보통 남자가 재주의 역할을 하나, 남편인 정현이 죽고 없어 재주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때의 재산권에 대한 권리는 어떻게 인정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흥식이는 네 친자식 같이 하라고 부탁 않겠다. 김실도 잊지 못하니 열 마지기만 주어라. 남매 합해서 한섬직이 주어도 오륙십 마지기가 남지 않느냐. 또 김실에게 암수소를 ○마리를 주어라. 이왕 네가 마음만 먹으면 ○마리를 주어도 남는 소가 수십 마리가 될 것이다. 기해년 동짓달 초엿새날(1959년 11월 6일)구입한 소이니 너도 짐작할 것이다."

이 당시만 해도 소는 아주 큰 재산목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농기구가 없어 소에 의존하는 농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를 분양하여 재산을 증식하는 것이 당시 지주나 땅(돈)있는 사람들의 재테크 방법이기도 하였다.

한 집안의 가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5백년의 종통이 이어져 가는 해남윤씨가에서 종부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철저한 성리학적 규범 속에서 여자는 남존여비의 사상에 갇혀 그 역할이 축소되었으나 혈통을 이어가게 한 것은 그 집안의 종부였다. 어려운 시대를 강철 같은 심정으로 살아야 했던 게 사대부가의 종부의 삶이었던 것을 보면 그 위치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야 할 것 같다.

해남윤씨가는 종부들의 덕이 있었던 때문일까. 일제하와 6·25라는 변란 속에서도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어초은 윤효정의 적선과 고산 윤선도가 가훈에 남긴 그 뜻을 떠올리게 한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입니다.

덧붙이는 글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입니다.
#해남윤씨 #광주이씨 #유서 #규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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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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