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기 격변의 시대를 살다간 해남윤씨가의 종부인 광주이씨 부인. '규한록'을 쓴 19C의 광주이씨 부인을 떠올리게 한다.녹우당
해남윤씨가는 조선왕조의 기운이 다해가는 19세기 무렵 종통이 제대로 계승되지 않아 대가 끊길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다행히 종부인 광주이씨 부인에 의해 겨우 집안을 추스르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보다 더 예측할 수 없는 때가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으로 나라를 잃고 새로운 시대로의 변혁을 겪어야 했던 근대기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이자 식민지 하에서 새로운 생존의 방법을 강구해야 했던 이 시기는 한 집안의 존망이 짧은 순간에 결정되어 버리기도 하였다.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문중사를 놓고 볼 때도 이 시기는 매우 어려운 때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 토지를 기반으로 유지되어 온 양반지주의 신분사회가 완전 해체되고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도입해야 했기 때문에 '모험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살았던 종부로 해남윤씨가의 가업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이가 윤정현의 부인인 광주이씨(1882~1971)다. 해남윤씨가는 광주이씨가와 유독 인연이 깊음을 알 수 있다. 고산의 8대손 종부이자 '규한록'을 쓴 광주이씨 부인은 기울어가는 해남윤씨가를 다시 일으킨 종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보성(대곡)지역에 근거를 두고 행세했던 광주이씨는 조선시대 양반가의 결혼이 명문가와의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당파적 관계를 떨쳐버릴 수 없었듯이 광주이씨 또한 같은 남인계열로 이들의 결혼도 이 같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이씨 부인이 1834년(순조 34년)에 쓴 '규한록'은 순 한글로 쓰여진 작품으로 잠시 친정인 보성 대덕에 가 있을 때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소회를 궁체상서(宮體上書)로 쓴 편지형식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규한록을 쓴 광주이씨의 4대손 종부가 정현의 부인인 광주이씨로 한글로 쓰인 편지형식의 유서가 규한록과 매우 유사함을 느끼게 한다. 그 내용 또한 종부의 고단한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더욱 동질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윤정현과 광주이씨 부인은 해남윤씨가에 있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종손이자 종부로 살다간 인물이다. 윤정현은 현 종손의 조부로 6·25가 나던 해에 사망했으나 현 종손의 기억 속에도 아직 생생하다. 하지만 윤정현이 태어나던 1882년(고종19)은 조선왕조가 유지되고 있던 때로 이때를 생각하면 아주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혼란의 시대 상황 속에서 살아갔을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