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물로 눈 씻으면 세상과 날 바로 볼 수 있을까?"

[룩소르에서 다마스커스까지 47]실로암과 히스기야터널, 다윗의 무덤

등록 2007.07.02 16:24수정 2007.07.0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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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 샘터 모습
실로암 샘터 모습이승철
부슬부슬 겨울비가 내리는 감람산을 출발하여 실로암 연못으로 향했다. 거리는 지척이었다. 작은 골짜기를 지나 맞은편 예루살렘 성 아래 언덕 중턱에 실로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접근은 쉽지 않았다.

실로암으로 가는 길이 언덕의 비탈길이어서 좁은 길을 구불구불 올라 버스에서 내려 미로 같은 좁은 골목과 계단을 오르고 내려 실로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구에서 또 잠깐 기다리라고 한다. 입장하는 사람들의 수를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랍어로는 '실완'이라고 불리는 이 실로암은 '히스기야터널'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아래 못의 물' 또는 '천천히 흐르는 시로아의 물', '윗 못의 수도 끝'으로도 불린다. 역사가 깊고 신비한 능력의 물로 알려진 만큼 불리는 이름도 그만큼 다양한 것이다.

이 샘은 예루살렘의 성안에 있는 황금사원에서 왼쪽 길로 300m 거리에 있다. 비좁은 비탈길에서 내려가는 32개의 역시 비좁은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데, 이곳을 나타내는 특별한 모양의 표지판이 입구에 서 있었다.

드디어 비좁은 계단을 밟고 내려간 곳에서 나타난 실로암은 연못이 아니었다. 좁은 바위틈의 히스기야 터널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도랑이었다. 도랑 옆 한쪽엔 돌로 쌓은 높다란 축대가 있고 좁은 공터 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실로암입구 안내판
실로암입구 안내판이승철
실로암과 히스기야터널 입구 풍경
실로암과 히스기야터널 입구 풍경이승철
"연못이 아니고 도랑물이네."
누군가 신약성경에 기록된 내용과 다른 모습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제법 넓고 둥그런 모습의 연못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은 우리들도 모두 그렇게 상상하고 있었다. 신약성경에는 분명히 못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한복음 9장 1절 6~7절)


그런데 이 도랑으로 흘러드는 수원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물줄기를 따라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컴컴한 동굴이다. 이 동굴에서 흘러나온 물이 실로암으로 흐르는 것이다. 실로암으로 물줄기를 대고 있는 이 동굴이 바로 그 유명한 히스기야동굴이었다.

히스기야동굴. 이 동굴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7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BC 701년 봄 앗시리아의 산헤립왕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유대를 공격한다. 그들은 도중의 작은 도시들을 휩쓸고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런 다급한 상황을 맞은 유대왕 히스기야는 성 밖의 물줄기인 기혼샘에서 성안으로 물줄기를 돌릴 것을 명령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곧 유대의 군대가 지하로 바위굴을 파기 시작했다. 앗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면 성 밖의 수원지인 기혼샘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급박했다. 물이 없으면 성안에서 농성하며 성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2700년 전에 만들어진 바위동굴인 히스기야터널
2700년 전에 만들어진 바위동굴인 히스기야터널이승철
실로암 근처에 있는 한 유치원 모습
실로암 근처에 있는 한 유치원 모습이승철
기혼샘에서 성 안까지 이르는 대규모 터널공사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양쪽에서 마주 나아가며 뚫고 들어가는 공법이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작업하기도 어려운 폭 60㎝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횃불을 밝히고 하는 작업은 여간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몰려오는 적을 생각하면 죽느냐 사느냐의 순간이었다.

미국의 성서지리학자 로빈슨은 1838년 기혼샘에서부터 좁은 터널을 따라 실로암까지 탐사한 최초의 인물이다.그는 26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터널바닥에 쌓인 진흙을 밟으며 어렵게 터널을 탐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히스기야터널의 마지막 비밀은 1880년에야 밝혀졌다.

1880년 여름 근처에 살고 있는 아랍인 아이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흐르는 실로암 도랑물에서 물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우연히 물이 흘러나오는 바위틈의 터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이는 몇 미터정도 들어가다가 터널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에 어렴풋이 드러난 벽의 글씨를 발견하였다.

이 소문은 당시 예루살렘지역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고고학자 콘더(C,R,Conder)와 세이스(A,H,Sayce)그리고 또 한명의 독일인 등 고고학자들에게 알려졌고 이들은 경쟁적으로 이 비문을 해독하는데 매달렸다.

고대 히브리어 문자가 여섯 줄로 기록된 이 비문은 200자로서 마치 오늘날의 신문기사처럼 지하터널 개통당시의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기록해 놓고 있었다. 이 비문에 의하면 히스기야터널은 고대 이스라엘 토목공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난공사였다.

하교길의 개구쟁이들
하교길의 개구쟁이들이승철
아랍인 여교사와 어린이들
아랍인 여교사와 어린이들이승철
그렇게 발견된 이 터널은 길이가 무려 525m나 된다고 한다. 이 터널을 통하여 끌어들인 물줄기로 유대의 히스기야왕은 앗시리아의 침공을 막아 잘 버텨 낼 수 있었고, 침공 당사자인 앗시이아의 산헤립은 결국 퇴각하다가 죽고 말았다.

아쉬운 것은 비문이 발견된 지 10년이 지난 1890년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한 그리스인이 어느 날 밤 이 히스기야 터널로 들어가 이 비문을 떼어낸 것이다. 도굴이었다. 그러나 이 작업과정에서 비문의 작은 조각들이 터널바닥의 물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굉장히 심각한 훼손이었다.

이 도굴꾼은 예루살렘의 한 골동품 상점에 비문 조각들을 팔아 넘겼지만 진상을 파악한 오스만 터키 당국은 이 유물들을 압수했다. 그래서 이 비문의 조각들은 지금도 터키의 이스탄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일행들이 실로암과 히스기야터널을 돌아보고 있을 때 몇 명의 다른 한국인 관광객들이 들어 왔다. 이들도 처음에는 연못이 아니라 도랑물인 것을 보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예수님은 이 실로암 샘물로 눈을 씻어 소경의 눈을 뜨게 했는데, 이 샘물에 내 눈을 씻으면 세상과 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을 만큼 밝아지려나?"

물가로 내려가는 40대로 보이는 남성이 혼잣말처럼 하는 말이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뜻이 깊은 말이다. 눈을 뜨고 있으나 세상과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나 자신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사람인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들이 준 모자를 쓰고 다윗묘에 들어간 필자(중앙)과 일행들
그들이 준 모자를 쓰고 다윗묘에 들어간 필자(중앙)과 일행들이승철
다윗왕의 무덤 입구표지
다윗왕의 무덤 입구표지이승철
그의 말을 되새기며 실로암 샘터를 나서 다윗왕의 무덤을 향했다. 실로암 샘터 지역은 경사지에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산비탈의 주택가였다. 샘터 바위 위쪽에는 허술하지만 유치원처럼 보이는 시설도 보인다. 아랍인들의 시설인지 초라하고 가난한 모습이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도로로 나서자 마침 학교가 끝났는지 개구쟁이들 몇이 장난을 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일행들이 손을 흔들었지만 녀석들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지 그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우리들이 타고 갈 버스가 기다리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는 여교사들 몇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아마 가까운 지점까지 아이들을 바래다주는 모양이었다. 여교사와 함께 걷는 아이들은 그래도 별로 수줍음을 타지 않고 같이 손을 흔들기도 하는 밝은 모습이었다.

다윗왕의 무덤은 성안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은 오늘의 이스라엘 건국이념인 시오니즘 속에 녹아있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왕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그의 무덤이 특별히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다만 그의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관리인이 내주는 하얗고 둥그런 모자를 써야만 했다. 다윗의 무덤은 휘장으로 가린 안쪽에 관을 덮은 히브리어와 그림이 새겨진 검은 천이 전부였다.

다윗왕의 무덤을 지키는 엄숙한 모습과 표정의 관리인
다윗왕의 무덤을 지키는 엄숙한 모습과 표정의 관리인이승철
예의 검은색 천으로 덮인 관 안에 시신이 들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벌써 30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관은 그냥 상징적인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그 관 앞에 버티고 서있는 랍비(관리인, 선생)는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이며 엄숙한 표정이 위대한 조상을 모시는 후손의 자세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22일부터 2주간 북아프리카 이집트 남부 나일강 중류의 룩소르에서 중동의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까지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1월22일부터 2주간 북아프리카 이집트 남부 나일강 중류의 룩소르에서 중동의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까지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실로암 #히스기야터널 #다윗묘 #다윗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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