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근처에 있는 한 유치원 모습이승철
기혼샘에서 성 안까지 이르는 대규모 터널공사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양쪽에서 마주 나아가며 뚫고 들어가는 공법이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작업하기도 어려운 폭 60㎝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횃불을 밝히고 하는 작업은 여간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몰려오는 적을 생각하면 죽느냐 사느냐의 순간이었다.
미국의 성서지리학자 로빈슨은 1838년 기혼샘에서부터 좁은 터널을 따라 실로암까지 탐사한 최초의 인물이다.그는 26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터널바닥에 쌓인 진흙을 밟으며 어렵게 터널을 탐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히스기야터널의 마지막 비밀은 1880년에야 밝혀졌다.
1880년 여름 근처에 살고 있는 아랍인 아이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흐르는 실로암 도랑물에서 물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우연히 물이 흘러나오는 바위틈의 터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이는 몇 미터정도 들어가다가 터널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에 어렴풋이 드러난 벽의 글씨를 발견하였다.
이 소문은 당시 예루살렘지역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고고학자 콘더(C,R,Conder)와 세이스(A,H,Sayce)그리고 또 한명의 독일인 등 고고학자들에게 알려졌고 이들은 경쟁적으로 이 비문을 해독하는데 매달렸다.
고대 히브리어 문자가 여섯 줄로 기록된 이 비문은 200자로서 마치 오늘날의 신문기사처럼 지하터널 개통당시의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기록해 놓고 있었다. 이 비문에 의하면 히스기야터널은 고대 이스라엘 토목공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난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