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5일 인왕산에서 바라본 개성 송악산. 오른쪽 봉우리가 삼각산 의상봉이고 손에 잡힐 듯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것이 개성 송악산이다.구룡산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이무를 처결한 태종은 심신이 피로했다. 쉬고 싶었다. 숨 막힐 것 같은 한양을 벗어나 바람을 쐬고 싶었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탈상도 끝났다. 마음 같아서는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조선에 들어오면 대충 업무를 마무리하고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나는 명나라 사신들이 부러웠다.
개경에서 개성 유후사로 명칭은 바뀌었지만 개성은 마음의 고향이다. 송악산 품에 안기면 지친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또한 개성은 어머니 신의왕후가 지근거리에 잠들어 있는 곳이다. 어머니의 능침을 살펴보고 개성에 머무르면 피로가 회복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개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의정부에 개성 거둥을 준비하라 명했다.
공신과 정승은 물론 각사(各司)를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한양에 남고 반은 호종하게 했다. 한양에는 오직 한성부, 성균관, 전사시, 전농시, 광흥창, 도염서, 혜민국, 제생원, 전옥서만이 도성에 머물게 했다. 조정이 옮겨가는 셈이다. 이러한 채비는 하루 이틀에 돌아올 일이 아니라 장기간 머무를 계획이다.
슬픔에 잠겨있는 정비에게 큰 선물을 준비하다
중궁전을 지키던 정비와 세자는 물론 왕자도 대동했다. 어엿한 성년에 이른 세자 양녕은 세자빈을 거느리고 뒤 따랐다. 열세 살배기 충녕(세종)은 무조건 좋았다. 한양에서 태어난 충녕은 양녕, 효령 두 형님처럼 개성에 대한 아릿한 추억은 없지만 행차 그 자체가 좋았다.
태종의 개성 행차는 아버지와 두 동생을 잃고 비탄에 잠겨있는 왕비 민씨를 위로하기 위한 배려도 깔려 있었다. 깜짝 선물도 준비했다. 집안의 기둥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고 잘 나가던 두 남동생이 큰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으니 정비 역시 가슴 아픈 우울한 나날이었다.
한양을 떠나던 날. 태종은 번잡스러운 공식행사를 금지시켰다. 이에 사간원에서 예의에 어긋난다며 상소했다.
"인군(人君)의 거동은 대절(大節)입니다. 유후사에 행행(行幸)함에 있어서 성(城)에 드시는 길과 연(輦)에서 내리시는 때에 모두 처음 즉위하신 때와 같지 않으시니 신 등은 유감스럽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무릇 행행(行幸)하실 때에 모든 대간과 법관으로 하여금 수종(隨從)하게 하고 영송(迎送)하게 하여 만세에 법을 남기소서."
임금의 행차가 '너무 파격적이다'는 얘기다. 간소함이 도에 지나쳤으니 위엄을 세워달라는 얘기다. 태종은 듣지 않았다. 반송정에서의 환송행사마저 시행하지 말라 일렀다. 조용히 떠나서 소리 없이 돌아오고 싶다는 뜻이다. 임금을 태운 어가(御駕)가 임진 나루터에 머무를 때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을 불렀다.
"세자는 도성으로 돌아가라."
"아바마마 아니 되옵니다. 아바마마가 도성에 돌아가실 때까지 소자가 시종하겠습니다."
개성에 이는 부동산 광풍
태종은 세자 양녕의 소청을 가납했다. 이례적인 일이다. 임금이 도성을 비우면 세자가 지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태종이 허락했다. 왕도(王都) 한양은 권력이 공동화된 도읍지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뜻밖의 문제가 불거졌다. 부동산 광풍이다.
임금이 대소신료를 이끌고 개성으로 행차하자 한양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개성으로 또 다시 천도할 것이라는 유언비어였다. 개성에서 한양으로 환도할 때 곤혹을 치른 관료들이 먼저 선수를 치고 나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은 정보다. 정보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대부들이 움직이니 이재(理財)에 밝은 잡배들이 뛰어들었다. 뭐가 뛰니 망둥이도 뛰는 격이다.
개성에 부동산 광풍이 불었다. 한양의 집값은 폭락했고 개성의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에 편승하여 사대부의 부인과 고위관리들의 부인들이 설치기 시작했다. 원조 '빨간 바지'의 등장이다. 이들은 개성의 땅과 집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덩달아 집값과 땅값이 뛰어 올랐다. 부동산 파동의 악순환이다.
태종 즉위 초, 갑작스러운 한양 환도 당시 집을 마련하지 못한 관료들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고생을 많이 했다. 집이 있는 개성으로 출퇴근 할 수도 없고 집을 사자니 한양 집값이 폭등하여 개경 집을 판 돈으로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사놓은 집을 웃돈을 주고 사들이거나 집 매입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어 송사가 빈발하여 파직된 관리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모든 것의 매매에는 호가와 매매가가 있게 마련인데 당시 관료들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터무니없는 값을 쥐어주며 힘없는 백성들의 집을 빼앗다시피 했다. 삶의 터전을 관료들에게 빼앗긴 백성들은 관료들을 성토했다. 억울하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민원과 쟁소가 끊이지 않아 조정에서 구의동에 대토를 마련해주고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운 일이 있었다.
도강 금지를 발표한 극약처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