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남정미소엔 참새는 없다, 그러나...

[온고을 사람들 5] <묏동전> 김지연 작가, 그녀와 '정미소' 이야기②

등록 2007.08.09 10:37수정 2007.08.0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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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남정미소 전경 ⓒ 안소민

이 날은 장맛비가 굉장했다. 오랜만에 시야를 뿌옇게 만드는 장대비를 바라보며 김지연 작가를 기다렸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가는 길에는 갑자기 김 작가의 차까지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차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김 작가와 나, 두 사람은 완전히 흠뻑 젖어있었다. 보험회사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서로의 젖은 모습을 보고 웃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안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거짓말처럼 활짝 개어있었다.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에 들어서니 저만치 계남정미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을 맞기 위해 깨끗이 세수를 마치고 기다리는 안주인의 얼굴처럼 그것은 예쁘고 반가웠다.

지난 묏동전에서 만난 김지연 작가의 창작의 산실인 진안군 계남정미소를 방문한 것은 지난 7월 말이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정미소라는 곳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공동체 박물관이라는 곳도. 김 작가와 나눈 이야기를 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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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남정미소 실내에 들어섰을 때 정면으로 마주치는 풍경. 옛것이 그대로 있다. ⓒ 안소민

안소민(이하 안) "정미소를 개축한 갤러리라는 곳이 어떤 곳일까 감이 안 왔는데, 이런 곳이었군요. (조금 둘러본 뒤) 여기 오기 전에는 그저 막연히 낭만적인 곳일 거라 생각했는데 정미소에 존재했던 기계들을 보니 갑자기 그 당시 상황이 짐작이 갑니다. 엄두가 안 났을 것 같아요."
김지연(이하 김) "그렇죠? 지금이야 이렇게 꾸미고 공사를 해서 그럴듯해 보이지, 처음에는 정말 엄두가 안 났어요.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정미소였어요. 지붕하나, 기둥하나 처음부터 다시 일일이 손봐야했어요. 얼핏 보면 원래 있던 정미소에 갤러리만 새로 덧붙인 것 같지만 기계 빼고는 모두 다 새로 다시 지은 거예요."

"고생이 말이 아니었을 텐데요. 어떤 작업이 가장 힘들었나요?"
"이곳이 원래 논이었거든요. 논을 밭으로 메우는 작업부터 시작했어요. 인부들 다루는 일도 만만찮았죠. 새로 물도 끌어와야 했고 전기도 들여놓아야했어요. 그 과정에서 이 지역 동네분들이 반대를 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많이 이해해주고 도와주시지만 그때만 해도 그분들이 이해를 못했거든요.

'웬 낯선 여자가 와서 왜 정미소를 뜯어고친다고 난릴까' 이런 시선이었어요. 그렇다고 근사한 건물을 짓는 것도 아니고 정미소를 그대로 둔다고 했으니 더욱 의아해했지요. 아마 다른 작업보다 마을분들을 이해시키고 동조를 얻는 과정이 가장 힘들지 않았나 싶어요."

왜 하필 정미소일까?

"네. 그랬겠군요. 그런데 사실, 저도 궁금합니다. 왜, 하필 정미소일까. 다른 곳 다 놔두고 왜 이곳 정미소에 갤러리를 꾸밀 생각을 하셨는지요. 궁금합니다."
"(웃음) 어릴 적 제 추억에 있던 정미소는 귀한 쌀이 좔좔 흘러넘치는 곳이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쌀이 귀했잖아요. 할머니를 따라 정미소에 가보면 사방에 흘러넘치는 쌀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어요. 보기만 해도 배불렀죠. 그리고 정미소에는 항상 동네아주머니들이 계셨어요. 거기서 사는 이야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이웃 소식도 전해 듣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저에게 정미소는 그런 추억이 있는 곳이에요. 한마디로 부의 상징이었죠. 여기서 부는 비단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진 않아요. 마음도 풍족하고 따뜻해지는 곳이었어요, 정미소는.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이 정미소가 하나둘 없어지는 것 아니겠어요. 정미소 사진을 찍게 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어요. 폐가로 흉측하게 변해서 마을 어귀에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취급당하는 정미소가 하나둘씩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되겠다, 이곳을 사진으로나마 남겨놓자'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보니 정미소가 너무 좋아지는 거였어요. 그래서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이곳을 인수하게 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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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에 한쪽에 붙어있던 '도정요율표' ⓒ 안소민

"이곳 계남정미소를 운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요? 혹 이곳에 아는 분이라도 있었나요?"
"특별히 아는 분은 없었어요. 그냥 우연히 이 지역을 지나다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 같긴 해요. 계남정미소를 만나기 전까지 저에게 진안은 아무 연고도 없고, 와본 적도 미지의 곳이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된 걸 보면 어떤 힘이 작용했겠죠."

김지연 작가는 2006년 2월 이곳 계남정미소를 인수해 개축공사를 하고 그해 5월 '계남마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개관전을 열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마이산으로 가다'라는 제목의 두 번째 전시회를 했다.

"'계남마을사람들' 전시회는 어떤 전시회였나요?"
"이름그대로 계남마을 사람들의 사진전이었어요. 계남마을 사람들의 젊음과 인생, 삶의 굴곡들이 생생하게 담긴 사진들을 모아서 전시회를 열었죠. 계남정미소의 성격과 취지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전시회였어요."

"계남면 주민분들이 쉽게 협조를 하던가요?"
: "물론 처음에는 절대 쉽지 않았죠. '저 여자가 처음에는 쓸데없는 정미소를 뚝딱뚝딱 뜯어고치더니 이제는 도대체 남의 사진을 가지고 뭘 하려는 것인가. 돈을 벌려고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이 시골 마을에서 우리들 사진을 걸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하는 의혹들이 가득했죠.(웃음)"

"어떻게 설득에 성공하셨어요? 삼고초려라도 하셨는지..."
"거의 그런 분위기였죠. 그분들 자제분들이 오셔서 설득하고 설명하니까 그제야 사진을 보여주셨어요. 그분들에게는 아주 귀한 것이었죠."

"두 번째 사진전도 만만치 않았겠는데요?"
"그렇죠. 아마 처음에는 다들 계남정미소 설립의 취지를 잘 모르셔서 그랬던 것 같아요."

농촌의 여염집 아낙같은 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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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남정미소에서 밖으로 나오면 눈앞에 펼쳐지는 옥수수밭이 장관이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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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에 따라 몸을 비벼대는 옥수수잎대의 소리가 예까지 들리는 듯하다. ⓒ 안소민

이곳은 너무 조용하다. 적막하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리라. 가끔 우~하는 소리에 돌아보면 계남정미소 맞은편에 있는 옥수수대가 불어대는 바람에 몸을 뒤섞고 있다. 계남정미소에는 정미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옆으로는 이름모를 야생화들과 가지, 고추, 방울토마토와 같은 먹거리들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터를 잡고 있다. 모두 김 작가의 손길이 가는 것들이다. 정미소에 도착하자마자 그것들을 쓰다듬는 김 작가는 사진작가라기보다는 농촌의 여염집 아낙같기도 했다.

"이곳에 오시면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시는지요? 너무 조용해서 비현실계에 와있는 느낌이 듭니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시간이 그냥 흘러가버려요. 아침에 일찍 와서 청소 좀 하고 논밭의 잡초 좀 솎아주다 보면 하루가 그냥 지나가거든요. 손봐야 될 곳도 하루가 멀다 하고 생기구요. (천정을 바라보며) 그러고 보니 저기 물 새는데 손봐야 되는데."

"큰비가 오고 난 뒤라 그런지 매우 조용하고 깨끗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창작하시는 분들이라면 이런 공간이 매우 탐날 것 같아요. 이런 공간."
"원래 백조가 보기에 우아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지 노력을 하거든요. 사실 저도 그래요. 혼자서 이곳을 운영하다보면 어려움이 많아요.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니까요. 전시기획에서부터 지붕수리까지요(웃음). 오늘같이 큰비라도 오거나 천둥이라도 요란하게 치는 날이면 걱정부터 되죠. 어린자식 물가에 내놓은 엄마마음 그런 거죠. 어디 쓰러지지는 않았을까, 어디 부서지지는 않았을까. 이래저래 항상 염려되고 신경쓰입니다."

"낳아놓은 자식, 다시 배속으로 넣을 수도 없구요.(웃음)"
"그래서 저희 남편은 사서 고생한다고 그래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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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촌 조병희 선생님을 기리며>는 이달 말까지 전시된다. ⓒ 안소민

"지금 전시중인 '작촌 조병희 선생님을 기리며' 전은 사진으로 보는 개인의 역사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을 듯싶어요."
"네. 작촌 선생님을 처음 뵌 건 작고하기 4년 전쯤이었어요. 그분을 딱히 뭐라고 한마디로 지칭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이 지역 향토문화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꼈던 분이었죠. 그분이 살아계실 때 앨범을 본 적이 있어요. 그 사진 속에는 자제분들의 어릴 적 모습, 친지의 결혼식, 조부모님의 장례 모습 등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담겨있었어요.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이렇게 다양한 사회사적 모습을 볼 수 있기는 그리 쉽지 않을 거예요. 그것도 사진으로요. 매우 의미 있는 사진들이었죠."

포근한 정이 모락모락 익어가고 있는 계남정미소

"결국, 김 작가님께서 추구하는 사진의 존재의미랄까요. 그것도 결국 이런 것이 아닐 런지요."
"네. 지난 묏동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전 지나간 것, 옛것,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에 대해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어요. 예술사진도 물론 좋지만 한 사람의 삶과 역사를 담고 있는 사진, 한 시대의 아픔, 슬픔, 기쁨 등의 정서를 고스란히 껴안고 있는 사진들을 좋아해요.

참! 올해 추석무렵부터 전북도청사 갤러리에서 '이발소전'을 해요. 이발소도 제가 몇 년 동안 쭉 찍어왔던 대상이에요. 그 사진들을 모아서 이번에 한번 선보이려고요. 이발소도 이제 우리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거든요."

"다른 계획은요?"
"8월 6일부터 10일까지 이 지역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체험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 지역 아이들은 도시아이들에 비해서 디카와 같은 디지털 문화에 소외되어있어요. 이번 행사 제목은 '계남정미소에 사진찍으러 가요'인데 바늘구멍사진기를 만들어봄으로써 사진의 원리와 현상을 직접 경험해보는 자리예요. 자신이 만든 사진기를 가지고 섬진강에 있는 물고기도 촬영해보고 옥수수 수확하는 현장도 직접 찍어보는 자리를 마련할 계획이에요."

"우와~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아요. 사진도 찍고 옥수수도 따고, 물고기도 잡고."
"이 지역만이 줄 수 있는 특성과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죠. 아마 동네분들도 많이 좋아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동네분들과는 많이 친해지셨나요?"
"아유~ 이젠 뭐 거의 딸같죠. 처음에는 많이 낯설어하셨지만 지금은 많이 이해하시고 또 많이 좋아하세요. 심심하면 이곳에 놀러 오셔서 사진도 둘러보시고 낮잠도 주무시고 가세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김 작가와 막 처음 정미소에 도착했을 때 동네 마을분이 김 작가의 우편물을 대신 맡아놓았다가 가져다주었을 때 '점심 먹구 가' '아녀. 그냥 갈래'라는 두분의 대화에서 옆집 언니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취재를 마친 뒤, 나를 바래다주기 위해 김 작가의 차를 타고 마을 어귀를 돌아설 때 그때 정자에 앉아서 쉬시던 할머니 한분이 '벌써 집에 가남?'이라고 살갑게 물어 오시는 것에서 이미 이 동네의 일부가 되어버린 김 작가와 그의 공간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계남정미소에 참새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라는 김 작가의 솜씨인 듯한 스케치가 그곳에 걸려있다. 보는 순간 마음 한곳이 찡해왔다. 그러나 참새가 오지 않으면 어떠랴. 이미 그곳에는 많은 발길들이 오가고 있다. 하얀 쌀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 그곳에는 수많은 이야기들과 포근한 정이 모락모락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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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가 구수하게 익어가는 계남정미소. ⓒ 안소민

그녀와의 특별한 점심

ⓒ안소민
애초 진안시내에서 맛있는 것을 사주려고 했단다. 그러나 나의 잘못된 시간계산과 뜻하지 않았던 차량말썽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빠듯한 점심을 먹어야했다.

뭐 굶어도 상관은 없었다. 점심 한끼 굶는다고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김 작가는 주인입장에서 그게 아니었던 모양. 더구나 명색이 '정미소'까지 왔는데. 김 작가는 조금 궁리하다가 뜻밖의 제안을 꺼냈다. '라면 드실래요?'

비 오는날, 조금은 눅눅한 방안에서 젖은 머리를 말리며 먹었던 그날의 라면 맛은 정말 최고였다. 이제껏 많은 라면을 먹어왔지만 그날처럼 맛있었던 라면은 아마 없었던 듯하다. 김 작가가 정성들여 수확한 파와 야채까지 곁들였다. 게다가 약간은 덜익은 듯한 꼬들꼬들한 면발을 좋아하는 내 식성까지 어떻게 사전입수(?)했는지 내 입맛에 딱 맞게 나온 라면이었다. 연신 '맛있다'를 연발하는 내게 김 작가는 '원래 남이 해주면 더 맛있다'며 겸양을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마신 진한 커피 한 잔도 정말 잊을 수 없는 후식이었다.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취재를 마치고 가는 내손에 김 작가는 자신이 직접 기른 토마토와 가지, 고추를 담은 봉투를 쥐어주었다. 토마토의 생김은 굉장히 거칠었다. 아마 자연에서 날 것 그대로의 상태로 자랐기 때문이리라. 가지는 집에 가지고 가서 무침을 해먹었다. 가지무침을 한입 먹었을 때 우~하던 옥수수 잎사귀 소리가 들렸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잊을 수 없는 성찬이었다. / 안소민

덧붙이는 글 | 계남정미소 홈피 http://www.jungmiso.net/

덧붙이는 글 계남정미소 홈피 http://www.jungmiso.net/
#정미소 #김지연 #묏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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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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