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54회

등록 2007.08.20 08:09수정 2007.08.20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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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을 내려가서 십여 장 정도까지는 키가 큰 지공으로서는 약간 고개를 숙일 정도의 좁은 통로였지만 우측으로 구부러진 곳을 지나자 놀랄 정도로 잘 만들어진 통로를 볼 수 있었다.

다섯 명 정도의 장정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닐 수 있는 넓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양쪽 벽에 사오 장 거리마다 엇갈려 유등(油燈)이 달려 있어 아주 어둡지만은 않았고 지공과 손번에게는 대낮과 다를 바 없었다.


“대단하군....”

지공이 더욱 긴장된 표정을 떠올리며 감탄했다. 이 통로는 모두 돌을 일정한 크기로 깎아 만든 것이었고, 표면이 아주 매끄러운 것으로 보아 단기간에 만든 것이 아닌 매우 공을 들여 만든 석로(石路)였다. 더구나 누가 설계했는지 모르지만 지하라면 느껴질 습기나 쾌쾌한 내음도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통풍장치 역시 잘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도망갈 구멍만큼은 확실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소.”

정말 도망칠 구멍치고는 너무나 잘 만들어진 석로였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긴장이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단지 도망갈 구멍이라면 이렇게까지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또한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 십여 장 정도마다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통로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망가고자 뚫어 놓은 통로라면 굳이 이렇게 길을 꺾어 만들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일정하게 직각으로 꺾여져 있어 더욱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

앞서 가던 지공이 왼쪽으로 돌면서 갑자기 걸음을 갑자기 멈췄다. 손을 들어 따라오던 손번이 자신을 지나치지 않도록 제지하는 행동을 보이자 손번 역시 지공의 등 뒤로 바짝 다가들며 앞을 보았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름없는 규모였고, 유등이 켜져 있는 것 또한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닥은 물론 양쪽 벽면, 그리고 천장까지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한 무늬로 이루어졌다는 것뿐이었다. 그것 역시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사실 없었다.

일정하게 금을 그어놓고 색칠을 한 것 같았지만 그것은 사실 흰색을 띠고 있는 돌과 약간 검은 빛깔을 띤 돌, 그리고 붉은 빛을 가지고 있는 돌 등 세 가지 재질이 다른 돌을 사용해 일정하게 엇갈려 만들어 놓은 것이었고, 사치스럽게 통로를 장식한 것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리면 그만일 터였다.

하지만 지공으로서는 왠지 불안한 느낌이 스멀거리며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굳이 이곳만 이렇게 만들어 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세 가지 색을 일정하게 조화시켜 만들어 놓은 이곳은 뭔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왠지 밟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허나 희미한 어둠 속에 묻혀있어 어디까지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몸을 날린다 해도 기껏 사오장이 고작이어서 어차피 지나가려면 밟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오?”

손번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지공에게 물었다. 손번으로서는 그렇게 본다면 분명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치명적인 기관장치가 되어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능성이 높네.”

지공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래도 찜찜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돌아가자는 말씀이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지공의 이성은 이대로 발길을 되돌려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더구나 지공 역시 지하의 토목이나 기관에 대해서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는 터.

“조심을 하자는 것이네.”

지공은 선뜻 발을 내딛지 않고 상체를 구부려 바닥을 톡톡 두들겨 보았다. 그리고는 양쪽 벽면을 오가며 똑같은 행동을 하더니 재차 색깔이 구분된 통로 쪽의 바닥이나 벽면도 손을 뻗어 똑같이 두드려 보았다. 다른 점은 없었다.

‘색(色)....세 가지 색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기에도 진식이 펼쳐져 있는 것일까?’

세 가지가 융합해 이루어지는 진이면 삼재(三才)를 이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삼재를 응용한 것이라면 그의 눈을 벗어나지 못할 터. 하지만 놓여있는 모습이 진식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였고, 그저 일정하게 놓여진 것뿐이었다.

‘하늘(天)....백색이다... 그렇다면 땅(地)은 흑색일 터..... 그렇다면 인(人)은 붉은색....?’

그러고 보니 세 가지 색깔의 조화는 사람의 보폭에 맞게 놓여져 있어 똑바로 간다면 처음 백색의 바닥을 딛을 경우 스스로 의식하지 않아도 계속 백색의 바닥을 딛게 되도록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찾아낼 수 없었다. 아니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색깔이 주는 의미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터라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 선택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것이 머리가 좋거나, 머리에 든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아주 간단한 것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는 점이다.

‘간단하게 풀어보자..... 이곳은 땅속.....지(地)가 생로일까?’

어차피 선택을 해야 했다. 이곳에 놓여진 세 가지 색깔과 전체를 이루고 있는 돌들이 주는 의미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저 끝 편을 바라보다가 마음을 정한 듯 손번에게 말했다.

“내가 밟은 곳만 따라서 밟도록 하게.”

말과 함께 그는 약간 검은 빛이 도는 곳을 오른 발을 내딛어 밟았다. 몸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또 왼발을 떼어 앞에 놓여진 검은 빛깔의 돌을 밟았는데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기우(杞憂)였나?’

하지만 아직 긴장감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는데 대여섯 걸음을 떼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자 손번에게 손짓을 했다. 어쩌면 자신이 선택한 것이 옳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릉---그르릉----

헌데 그들이 사오 장 정도 나아갔을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것은 분명 뭔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지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문...? 석문(石門)이 움직이는 소리다.’

이러한 통로에서 석문이 움직인다는 것은 통로의 방향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 속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지공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릉---그르르----

그의 생각은 맞았다. 잠시 계속되던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이미 방향을 완벽하게 바꾸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빌어먹을.... 정말 알 수가 없는 곳이군.’

이미 변화가 시작되고 끝났다. 이 색깔이 범벅된 통로는 연결된 곳을 바꾸는 것에 불과한 장치다. 지공이 우려하는 것과는 달리 잠시 긴장했던 손번은 소리가 끝남과 함께 아무런 변화가 없자 다소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다른 곳을 밟으면 또 다른 변화가 있지 않겠소?”

말과 함께 그는 장난스럽게 옆 쪽의 붉은 돌을 밟았다. 미처 지공이 뭐라 하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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