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정. 창덕궁을 창건한 태종이 북동쪽에 해온정을 지어 세종 때까지 사용했으나 현재의 부용정 위치와 동일한 장소인지는 알 수 없다.이정근
오늘따라 무엇을 해온 할 것인지 의미심장하다. 태종이 당호를 지을 때 인친의 정을 끊어내는 결정을 한 장소로 쓰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해온정에 쏟아지는 별빛이 유난히 차갑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그래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유사눌 뿐이었다.
"오늘 정부·공신·육조와 3성(三省)에서 청한 것이 윤당하니 유윤(兪允)을 내리소서."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미 그 죄에 벌을 받았고 민무휼과 민무회도 또 죄에 걸렸다. 민씨의 네 아들을 서로 잇달아서 죽이는 것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옛날 두헌이 궁액(宮掖)의 세력을 믿고 남의 땅을 빼앗았으나 장제(章帝)가 그에게 죄 주지 아니하니 후세의 사가들이 우유부단한 처사라고 기록 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두 사람을 죽이지 아니한다면 신 같은 자는 전하를 우유부단하다고 사책(史冊)에 쓸 것이니 만세의 뒤에 전하께서 어찌 우유부단하다는 이름을 피하실 수 있겠습니까?"-<태종실록>
"알았다. 그러나 나는 차마 발언(發言)할 수 없다. 전날부터 오늘 밤에 이르기까지 이 일을 반복(反覆)하여 생각하여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겠다."
"이것도 또한 전하의 고식적인 인(仁)으로 백중흑점(白中黑點)입니다."
신하로부터 질책을 당하는 임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자진(自盡)하면 가(可)할 듯하다."
"사사(賜死)하도록 하십시오. 저들의 자진함을 어찌 기다리겠습니까?"
처형 방법이 결정되었다. 이튿날, 의정부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부복하였다.
"불충한 죄는 왕법(王法)에 있어서 주륙(誅戮)에 해당하는 것으로 천지(天地)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역신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미 그 주륙을 당하였으나 그 형들이 죄도 없는데 죽었다고 하여 몰래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 불충한 죄가 뚜렷하게 나타났으니 법대로 처치하여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민무휼과 민무회를 내 어찌 사랑하여 보호하겠는가? 다만 어미 송씨가 연로하고 중궁이 몹시 애석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은 즉시 끊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륜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하공의 말이 옳다."
태종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맹진을 민무휼이 있는 원주로, 송인산을 민무회가 있는 청주로 즉시 떠나라 명했다. 다음날 한양으로 돌아온 이맹진과 송인산이 보고했다.
"민무휼과 민무회가 모두 자진(自盡)했습니다."
"민무휼과 민무회의 불충한 죄를 정부·공신·육조·대간·등 문무각사(文武各司)에서 여러 차례 신청하였으나 다만 정비(靜妃)의 지친이기 때문에 차마 법대로 처치하지 못하고 외방으로 유배했는데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서로 잇달아 목매어 죽었으니 더 이상 논하지 말라."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구름이어라
민무휼 민무회 형제가 세상을 떠났다. 왕비를 지친으로 둔 부귀영화도, 4형제가 입신양명하는 가문의 영광도 막을 내린 것이다. 왕기가 서려있는 사위를 맞아 좋아했던 민제를 비롯한 아들 4형제가 모조리 죽었다. 누가 그랬던가?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구름이라고.
이 때 세종 나이 열아홉이었다. 위로 양녕 효령 두 형을 둔 셋째였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했던 충녕은 아버지로 인하여 몸져누운 어머니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등극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기다. 태종은 양녕이나 충녕 인물 중심이 아니라 차세대 왕권에 걸림돌이 될 우려가 있는 외척을 척결한 것이다.
민무휼 민무회가 자진하던 날. 하륜을 탄핵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하륜과 민무휼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씨 형제를 처치한 칼끝이 하륜을 겨냥한 것이다. 하륜에게 직격탄이 날라 온 셈이다. 외곽을 때리던 공격의 칼날이 하륜의 심장을 겨누었다. 이제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한 백병전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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