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몸이 느낍니다

[달팽이가 만난 우리꽃 이야기 146] 나도샤프란

등록 2007.08.31 16:06수정 2007.09.0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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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샤프란이 가을하늘에 기대어 피어난 아침 ⓒ 김민수

▲ 나도샤프란이 가을하늘에 기대어 피어난 아침 ⓒ 김민수

열대야와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만 해도 가을이 올 것 같지 않더니만 사나흘 사이에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성큼 가을이 다가왔습니다.

 

봄은 볼 것 많아 눈으로 보고

여름은 자라나는 소리가 많아 귀로 듣고

가을은 갈바람 불어와 몸으로 느끼고

겨울은 봄을 위해 쉬는 것들을 마음으로 본다. <자작시-사계>

 

아침에 일어나 가을기운으로 숙면을 취한 몸을 깨우려고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가을이 몸으로 느껴집니다. 계절 중에서 가장 평등한 계절인 가을, 나는 모든 계절 다 좋지만 가을을 가장 좋아합니다.

 

옥상에 놓여진 화분에 분홍색 나도샤프란 한 송이가 피어났습니다. 자태로 보아 오늘 아침 햇살을 맞이하며 피어난 것 같습니다. 아, 높은 가을 하늘과 분홍색의 나도샤프란은 여염집 아낙네가 곱게 차려입은 고운 한복처럼 보였습니다.

 

푸른잔디에 기대어 피어난 나도샤프란 ⓒ 김민수

▲ 푸른잔디에 기대어 피어난 나도샤프란 ⓒ 김민수

같은 꽃이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 것이구나 싶더군요. 같은 꽃이라도 절벽에 피어난 것과 바닷가에 피어난 것과 들판에 피어난 것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서 있는 곳,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겠습니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평생 그 곳에서 살아가는 들꽃조차도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그리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부평초처럼 떠도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들을 보며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돌아보게 됩니다.

 

살면서 자기가 서 있는 곳을 돌아보는 시간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입니다. 자기가 서 있는 곳을 돌아봄으로 인해 자기의 정체성을 세워가는 것이요,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알아가는 것이겠지요.

 

가끔, 내가 서 있는 곳이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서 있고 싶은 그 곳에 서려면 지금 서 있는 그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지기에 지금 내가 서 있는 그 곳에서 나로 살아갑니다. 들꽃들이 자기가 뿌리 내린 곳에서 최선을 다해 피어나듯 나도 내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자연을 닮은 삶이겠지요.

 

이른 아침 안개가 낀 잔디밭에 은은하게 피어난 나도샤프란 ⓒ 김민수

▲ 이른 아침 안개가 낀 잔디밭에 은은하게 피어난 나도샤프란 ⓒ 김민수

 

제주도에 있을 때 마당 잔디밭에는 나도샤프란이 무성지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풋풋한 모습을 보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아침 햇살이 떠오르고 10여분 지난 뒤, 그리고 한 시간이 넘기 전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예쁩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땅에 들어온 외래종 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원예종으로 들어왔다가 야생화로 자리 잡은 것도 있고, 어떤 것은 곡물에 섞여 들어온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사료용으로 들어온 것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이 땅에 세대를 이어가면서 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우리 이름을 얻은 달맞이꽃같은 것들은 우리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코스모스나 나도샤프란 같이 외국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것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 우리땅에서 자라도 외래종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우리 땅에 정착을 했지만 외국이름이 붙어 있는 꽃들을 보면 외국인노동자들이나 이주여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농어촌지역에 시집와서 이 땅의 며느리가 된 이주여성들과 그의 자녀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에 대한 끊임없는 차별은 아무리 오랜 세월 우리땅에서 자랐어도 외래종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한 꽃들의 신세와도 같습니다.

 

혼자서 피어도 예쁘지만 이렇게 모여 피어도 예쁜 나도샤프란 ⓒ 김민수

▲ 혼자서 피어도 예쁘지만 이렇게 모여 피어도 예쁜 나도샤프란 ⓒ 김민수

 

어디에 피어도 그 꽃이듯 어디에 살아도 사람입니다. 피어나는 곳에 따라 색깔과 향기가 조금씩 다르더라도 그 꽃이듯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서 있는 곳에 따라 이방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이들이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이런저런 말들이 많습니만 타종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결과 생긴 일들입니다. 타종교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종교만 지고선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깨뜨려지지 않는 한 이번 사태와 같은 일들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타종교를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선교의 시작입니다. 진정한 봉사, 그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적인 색체를 띠고 봉사를 한다면 그것은 봉사의 본래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봉사의 수단화인 것이지요.

 

같은 꽃이라도 어디에서 서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듯 피어나는 곳에 따라 같은 꽃도 다르다. ⓒ 김민수

▲ 같은 꽃이라도 어디에서 서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듯 피어나는 곳에 따라 같은 꽃도 다르다. ⓒ 김민수

 

지난 여름 내내 옥상의 화분에서는 나도샤프란이 피어났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진 모델이 되질 않았습니다. 뜨거운 햇살 때문인지 이른 아침에 만난 그들이라도 사진에 담고 싶은 마음이 들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나흘 사이 여름에서 가을로 성큼 다가간 이후에 바라본 그들은 전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무엇이 변한 것일까요? 하늘과 바람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길어진 밤의 길이가 변했습니다. 그 작은 변화에 그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피어났습니다. '보라, 새롭게 되었도다!'하는 선언의 실현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여름이나 가을이나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피어났습니다. 단지 여름에 서 있었다는 것과 가을에 서 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새로움도 전혀 다름이 아니라 옛것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이네요.

 

가을, 몸이 가을을 압니다. 그렇게 몸이 가을을 느끼니 만물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07.08.31 16:06 ⓒ 2007 OhmyNews
#야생화 #나도샤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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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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